항목 ID | GC03100537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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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鄭元容 |
영어음역 | Jeong Wonyong |
이칭/별칭 | 선지(善之),경산(經山),문충(文忠) |
분야 | 역사/전통 시대,성씨·인물/전통 시대 인물 |
유형 | 인물/문무 관인 |
지역 | 경기도 광명시 |
시대 | 조선/조선 후기 |
집필자 | 김지석 |
[정의]
조선 후기 광명 지역의 대표적인 문신.
[가계]
본관은 동래(東萊). 자는 선지(善之), 호는 경산(經山). 영의정을 지낸 정태화(鄭太和)의 6세손이다. 할아버지는 사간원대사간을 지낸 정계순(鄭啓淳)이고, 아버지는 돈녕부도정을 지낸 정동만(鄭東晩)이다. 어머니는 용인이씨이다. 외할아버지는 예조판서 이숭호이다. 부인은 예조판서 김계락의 딸이다. 아들로 이조판서를 지낸 정기세(鄭基世)와 목사를 지낸 정기년(鄭基年)과 부사를 지낸 정기명(鄭基命)이 있고, 손자로 우의정을 지낸 정범조(鄭範朝)가 있다.
[활동사항]
정원용(鄭元容)[1783~1873]은 한양에서 태어나 1802년(순조 2) 문과에 급제하여 이조와 예조, 병조의 참판 등 여러 관직을 두루 거쳤다. 1821년(순조 21) 괴질이 서북 지방에 크게 번지고 10만여 명의 사상자와 천재(天災)가 발생하여 민심이 어지러워지자 관서위유사로 평안도 지방을 순찰하고 실상을 파악하여 대책 마련에 힘썼다. 1831년(순조 31) 동지사로 청나라 연경을 다녀왔다. 1843년(헌종 9) 판중추부사가 되었고, 1848년(헌종 14) 영의정에 이르렀다. 이듬해 헌종이 승하하자 강화에 살던 덕완군 이원범(李元範)을 왕으로 영립할 것을 주장하여 철종으로 옹립하였다.
이후 행정 일선에서 물러났으나 지방 행정의 문란과 민란이 발생하자 암행어사 제도의 부활을 건의하기도 하였다. 1863년 철종이 승하하자 승정원에 나와서 왕을 보좌하고 육조를 관리하는 원상(院相)으로서 국정을 관장하였다. 이듬해에는 실록청 총재관으로 『철종실록(哲宗實錄)』의 편찬을 주관하였다. 순조와 헌종, 철종, 고종 등 4대 왕에 걸쳐 72년간을 조정에서 보냈으며 여섯 차례 영의정을 지냈다. 1862년 철종으로부터 궤장을 하사받았고, 91세 잔치에는 고종으로부터 어전악(御前樂)인 이원락(梨園樂)의 연주를 하사받기도 하였다.
[학문과 사상]
정원용은 검소함과 청렴함을 본분으로 삼고 학문을 즐기는 자세로 관직에 임하였다고 한다. 또한 조선 후기 관기(官紀)의 문란과 어려움 속에서 삼정(三政)의 문란을 개선하고자 노력하였다. 특히 정액 이상의 가산 징수로 민원과 원망이 많았던 환정(還政)의 개선을 주목하여 이와 관련한 민의가 발생하면 관리를 엄중하게 문책하였다.
[저술 및 작품]
저서로는 『경산집(經山集)』 40권과 『황각장주(黃閣章奏)』 21권, 『북정록(北征錄)』 10권, 『수향편(袖香編)』 3권, 『문헌촬요(文獻撮要)』 5권, 『풍요삼선(風謠三選)』, 『연행일록(燕行日錄)』 등이 있다. 또한 1829년(순조 29) 정계순묘표(鄭啓淳墓表)의 문장을 짓고, 회령부사 시절인 1833년(순조 33) 함경도 회령에 건립된 현충사(顯忠祠)의 비문을 지었다.
[묘소]
묘소는 광명시 학온동에 있으며, 현재 광명시 향토유적 제2호로 지정되었다. 묘비는 1876년(고종 13) 맏아들 정기세가 지었으며, 글씨는 손자 정범조가 썼다. 정원용이 입었던 의대(衣帶)와 가문의 유품 등은 중요민속자료로 지정되어 국립중앙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다.
[상훈과 추모]
1873년(고종 11) 문충(文忠)이란 시호가 내려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