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3100536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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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鄭範朝 |
영어음역 | Jeong Beomjo |
이칭/별칭 | 우서(禹書),석정(石汀),규당(葵堂) |
분야 | 역사/전통 시대,성씨·인물/전통 시대 인물 |
유형 | 인물/문무 관인 |
지역 | 경기도 광명시 |
시대 | 조선/조선 후기,근대/개항기 |
집필자 | 김지석 |
[정의]
개항기의 문신.
[가계]
본관은 동래(東萊). 자는 우서(禹書), 호는 석정(石汀), 규당(葵堂). 증조할아버지는 돈녕부도정을 지낸 정동만(鄭東晩)이고, 할아버지는 영의정을 지낸 정원용(鄭元容)이고, 아버지는 예조참판과 승정원도승지를 지낸 정기세(鄭基世)이다.
[활동사항]
정범조(鄭範朝)[1833~1897]는 1859년(철종 10) 증광 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여 홍문관에 등용된 후 성균관 대사성과 홍문관 부제학을 거쳐 1879년(고종 16) 공조판서를 지냈다. 이어 예조, 병조, 호조의 판서를 역임하였고 우의정과 좌의정에 올랐다. 문장에 능하였으며 인품이 원만하여 당대의 학자 및 문인들과 교류하였다. 1880년(고종 17) 청나라의 제도를 모방하여 만든 통리기무아문(統理機務衙門)이 설치되자 당상으로 취임하였으며, 이듬해 사대교린사당상(事大交隣司堂上)·감공사당상경리사(監工司堂上經理使) 등을 역임하였다.
1884년(고종 21) 병조판서 및 한성부판윤, 1886년(고종 23) 독판내무부사(督辦內務府事)와 특진관(特進官)을 역임하였으며 수년간 여러 차례 호조판서를 역임하면서 격변기 어려운 상황 속에서 고갈된 국고를 맡아 타개책에 진력하였다. 1894년(고종 31) 갑오개혁 이후 벼슬에서 물러나 시흥 향리에 살다가 세상을 떠났다.
[학문과 사상]
문장에 능하였으며 왕이 총애하여 규당이란 호를 내렸다고 전해진다. 당대의 학자및 문인들과 교류하며 원만한 관계를 맺었다.
[저술 및 작품]
부친 정기세의 묘비문이 남아 있다.
[묘소]
묘소는 광명시 학온동에 있었으나, 1970년대 말 충청남도 청양군 정산면으로 이장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