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310053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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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鄭基世 |
영어음역 | Jeong Gise |
이칭/별칭 | 성구(聖九),주계(周溪),까치판서 |
분야 | 역사/전통 시대,성씨·인물/전통 시대 인물 |
유형 | 인물/문무 관인 |
지역 | 경기도 광명시 |
시대 | 조선/조선 후기,근대/개항기 |
집필자 | 김지석 |
[정의]
조선 후기의 문신.
[가계]
본관은 동래(東萊). 자는 성구(聖九), 호는 주계(周溪). 증조할아버지는 사간원대사간을 지낸 정계순(鄭啓淳)이고, 할아버지는 돈녕부도정을 역임한 정동만(鄭東晩)이며, 아버지는 철종 때 영의정을 지낸 정원용(鄭元容)이다. 아들로 정범조(鄭範朝), 손자로 정인승(鄭寅昇)을 두었다.
[활동사항]
정기세(鄭基世)[1814~1884]는 1837년(헌종 3) 정시(庭試)에 병과 제1인으로 급제하였다. 처음에 승문원정자에 임명된 후 사간원정언과 삼영종사관을 거쳤다. 1839년(헌종 5) 충청우도 암행어사를 거쳐 성균관대사성·병조참의·성천부사·홍문관부제학 등을 역임하였고 1853년 강화부유수, 이듬해 전라도관찰사가 되었다. 1862년(철종 13) 진주 민란이 일어나자 판의금부사와 형조판서로서 재직하였고 1864년(고종 1) 고종 즉위 후 더욱 중용되어 병조판서와 한성부판윤, 예조판서, 우찬성 등을 역임하였다. 1883년(고종 20) 기로소에 들어가 궤장을 하사받았다
정기세는 문장과 서예에 조예가 깊어 몇 차례나 제술관(製述官)과 문서사관(文書寫官)에 임명되었다. 또한 강화부유수와 전라도관찰사 재직 시 세제(稅制)를 공정하게 다루고 문교(文敎)를 진흥하는 등 선정을 베풀었다. 1865년(고종 2) 조선시대 마지막 법전이라 할 수 있는 『대전회통(大典會通)』을 편찬할 때 교정당상(校正堂上)을 맡기도 하였다.
[학문과 사상]
여러 관직을 두루 거쳤으나 전례문(典禮文)을 지어 바치던 제술관과 문서 사관, 『대전회통』을 편찬할 때 교정도감을 맡은 직함으로 추정할 때 학문과 문장에 능숙한 문예(文藝)에 밝은 인물임을 알 수 있다. 정기세는 겸손하여 다른 사람과 잘 거스르지 않고 기쁜 일을 잘 알려 주어 ‘까치판서’라는 별명이 전한다. 이유원(李裕元)[1814~1888]의 문집인 『임하필기(林下筆記)』 제26권에는 정기세에 대한 인물평으로 “크건 작건 익숙하지 않은 일이 없게 되었으며, 오늘날 의절과 전고에 관한 일은 그보다 나은 자가 없으니, 그야말로 재상 집안에서 재상이 나온 셈이다”라고 평가하고 있다.
[저술 및 작품]
저서로 『주계집(周溪集)』 5권이 전한다. 부친인 정원용의 『경산집(經山集)』을 편집하였으며, 『임하필기』의 서문에 글이 있다.
[묘소]
묘소는 경기도 하남시 교산동 산68번지 객산에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