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310052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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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金希說 |
영어음역 | Gim Huiyeol |
이칭/별칭 | 상경(商卿),가정(柯亭) |
분야 | 역사/전통 시대,성씨·인물/전통 시대 인물 |
유형 | 인물/문무 관인 |
지역 | 경기도 광명시 |
시대 | 조선/조선 전기 |
집필자 | 김지석 |
[정의]
조선 전기의 문신.
[가계]
본관은 순천(順天). 자는 상경(商卿), 호는 가정(柯亭). 익찬공파 26세손으로 아버지는 현감을 지낸 김약평(金若枰)이다. 조선조의 명장으로 육진을 개척한 김종서(金宗瑞)[1390~1453]의 후손이다. 부인은 파평윤씨로 현령을 지낸 윤숭선(尹崇先)의 딸이다.
[활동사항]
김희열(金希說)[1497~1551]은 1519년(중종 14) 식년 문과에 을과로 급제하여 벼슬길에 올랐다. 이후 사간원정언을 거쳐 홍문관교리 등을 지냈다. 1525년(중종 20) 사헌부지평에 임명된 뒤 세자시강원문학을 거쳐 사간원헌납이 되었다. 1527년(중종 22)에는 병조정랑을 거쳐 교리(校理)가 되었고, 이어서 의정부사인을 거쳐 1533년(중종 28) 승정원동부승지를 역임하였고, 1537년(중종 32) 한성부우윤을 거쳐 병조와 예조·호조의 참판을 차례로 지냈다. 1540년(중종 35) 개성부유수가 되었고 1542년(중종 37) 한성부좌윤·전주부윤을 거쳐 1551년(명종 6)에는 경주부윤을 지냈다.
[학문과 사상]
김희열은 사간원대사간으로 재직할 당시 권력을 전횡하며 여러 차례 옥사를 일으키고, 문정왕후(文定王后)의 폐위를 꾀하다가 사사된 김안로(金安老)·허항(許沆)·채무택(蔡無擇) 등 이른바 정유삼흉(丁酉三兇)을 탄핵하였다. 또 외직으로 경주부윤과 경기도관찰사 등에 재임할 때는 백성에 대한 구휼과 학문의 보급에 힘써 목민관의 귀감이라고 칭송되기도 하였다. 이러한 일면은 김희열이 지닌 소임의 충실함과 강직함을 보여 준다. 또한 외직에 재임 시 구휼과 학문을 장려한 사항은 애민 정신이 투철한 위정자의 모습을 보여 주는 사례이다.
[묘소]
묘소는 광명시 학온동에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