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3100449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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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鄭東晩墓碣 |
영어의미역 | Tombstone of Jeong Dongman |
분야 | 역사/전통 시대,문화유산/유형 유산 |
유형 | 유적/비 |
지역 | 경기도 광명시 노온사동 572 |
시대 | 조선/조선 후기 |
집필자 | 이동인 |
성격 | 묘갈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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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립시기/일시 | 1853년 |
관련인물 | 정동만 |
재질 | 오석 |
높이 | 1.51m |
너비 | 54㎝ |
소재지 주소 | 경기도 광명시 노온사동 572 |
소유자 | 정진흡 |
[정의]
경기도 광명시 노온사동에 있는 조선 후기 정동만의 묘갈.
[개설]
정동만(鄭東晩)[1753~1822]은 조선 후기의 문신으로 본관은 동래(東萊), 자는 우고(右古), 호는 졸암(拙庵)이다. 아버지는 대사간(大司諫) 정계순(鄭啓淳)이다. 1786년(정조 10) 진사시(進士試)에 합격한 후 1804년(순조 4) 경릉참봉(敬陵參奉)에 임명되어 경기도 고양군에 나갔으며, 1807년(순조 7) 의영고봉사(義盈庫奉事)가 되었다. 1810년(순조 10) 영유현령(永柔縣令), 1813년(순조 13) 재령군수(載寧郡守), 1815년(순조 15) 순흥부사(順興府使) 등을 역임하였다.
1817년(순조 17)에는 선혜청낭관(宣惠廳郎官)을 거쳐 이듬해 진주목사(晋州牧使)가 되었고, 1819년(순조 19) 다시 내직으로 들어와 혜국(惠局)의 낭(郎)이 되었으며, 1822년(순조 22) 아들 정원용(鄭元容)이 문과에 급제하여 크게 영달하였으므로 추은(推恩)의 혜택을 입어 통정대부(通政大夫)에 올라 첨지중추부사(僉知中樞府事)가 되었다. 그 뒤 곧 벼슬이 돈녕부도사(敦寧府都事)에 이르러 왕실 친족 간의 친목 도모에 진력하였다. 영의정에 추증되었다.
[건립경위]
정동만 묘갈의 건립 시기는 1853년(철종 14)이다. 그런데 1852년(철종 13)은 그의 아들 정원용(鄭元容)이 궤장(几杖)을 하사받은 해이다. 70세로 궤장을 하사받은 것도 영광이지만 노령이므로 부친의 묘역을 정비하고자 하는 취지에서 건립한 것으로 보인다.
[위치]
정동만 묘갈은 제2경인고속도로의 광명I.C를 나와 지방도 351호선을 타고 남쪽 방향으로 가면 바로 도로 왼쪽에 있다.
[형태]
무덤은 상석, 향로석, 망주석, 묘갈 등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봉분의 호석은 최근에 단장한 것이다. 상석은 고석과 계체석으로 올려져 있으며, 향로석은 직사면체이다. 묘갈은 방부옥개형(方趺屋蓋形)으로 크기는 높이 151㎝, 폭 54㎝, 두께 34㎝이며, 비신의 석재는 오석(烏石)이다.
[금석문]
비신의 앞면 상단에는 “증의정부영의정행돈녕부도정동래정공휘동만묘증정경부인용인이씨부좌”라 새겨져 있으며, 나머지 앞면 중 하단과 삼면에 비문이 적혀 있다. 묘표는 아들 정원용과 정헌용(鄭憲容)이 주도하여 세웠는데, 비문은 정원용이 짓고, 글씨는 손자인 홍문관부제학 정기세(鄭基世)가 썼다.
[현황]
묘역에는 정동만의 무덤과 함께 그의 아들인 정원용의 무덤이 나란히 있다. 최근까지 종가가 주변에 있었고, 광명시에서도 관심을 갖고 있어서 잘 정비되어 있다.
[의의와 평가]
정동만의 묘소가 노온사동 일대에 조성된 경위와 함께 이후 정원용 이래로 동래정씨의 종가가 정착하게 되는 계기가 되었다는 점에서 의의가 있는 유적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