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310041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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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六二五戰爭 |
영어의미역 | Korean War |
이칭/별칭 | 한국전쟁 |
분야 | 역사/근현대 |
유형 | 사건/사건·사고와 사회 운동 |
지역 | 경기도 광명시 |
시대 | 현대/현대 |
집필자 | 양철원 |
[정의]
1950년 6월 25일 북한군의 불법 남침으로 경기도 광명시에서 있었던 전쟁의 양상.
[개설]
1950년 6월 25일부터 1953년 7월 27일까지 약 3년 1개월간 지속된 전쟁으로, 당시 시흥군에 속해 있던 광명 지역도 전쟁의 영향에서 벗어날 수 없었다. 시흥은 서울~수원~오산으로 이어지는 인민군의 주공격 방향에서 벗어나 있었지만, 시흥군이 수도 서울에 인접했기에 서울 방어와 탈환을 위한 공방전이 전개된 지역임을 감안하면 적지 않은 피해를 입었을 것으로 보인다. 다만 현재 남아 있는 기록들로는 광명 지역의 구체적 피해 상황을 확인하기 어렵고, 시흥군 전체의 피해상을 통해 대략적인 상황을 추정하고 있다.
[역사적 배경]
1948년 남한에서 대한민국이 수립되자 1948년 8월 25일 북한에서도 최고인민회의 대의원 선거를 시행하고, 9월 9일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을 선포하였다. 이리하여 해방 이후 3년간의 정치 공백을 주체적으로 수용하지 못하고 강요된 외압에 따라 분단국가가 성립되고 말았고, 끝내는 6·25전쟁이라는 비극을 초래하게 되었다.
[경과]
6·25전쟁 당시 광명 지역은 지역별로 피해 상황의 크게 달랐다. 지역민의 말에 따르면 하안동 밤일마을의 경우 인천상륙작전 시 퇴각하던 인민군 20여 명을 본 것이 전부였다고 한다. 반면 원광명과 식골 등 광명동 지역에는 1·4후퇴 때 인민군과 중공군이 들어와 머물렀다고 한다. 주민의 증언에 따르면 원광명은 인민군 5군단의 본거지가 되어 주민들의 집에 인민군 장교들이 머물렀으며, 동네 아이들에게 인민군 노래를 가르치기도 했다고 한다. 또한 중공군이 마을의 돼지를 잡아먹는 것을 목격했다는 증언도 있다.
[결과]
광명 지역은 인근 안양이나 오산처럼 전투의 한복판에 있지는 않았으나 서면사무소와 서면초등학교가 반파되는 등 손실을 입었다. 1956년 간행된 『경기도지』에 따르면, 1951년 9월 1일 기준 서면을 포함한 시흥군의 사망자는 1,888명이고 91명이 납치된 것으로 되어 있다. 그러나 이후 정밀 조사 결과 남자 646명, 여자 1명이 납치된 것으로 나타났으며, 이중 주소·직업·연령이 확인된 사람은 620명이다. 현재 광명 지역인 서면에서 납치된 것으로 확인된 사람은 60명으로 집계되었다.
3년간의 전쟁 기간 동안 인명 피해뿐만 아니라 전쟁 재해민과 피난민도 많이 발생하였다. 특히 시흥군을 포함한 경기도 남부 지역은 피난민들의 집결지가 되었는데, 시흥 지역 난민 구호자의 규모는 1951~1955년 4만에서 6만 명 정도로 나타난다. 지금의 광명7동 지역에도 피난민들이 들어왔고, 작은 규모의[야시장과 같은] 장터가 세워졌다는 증언이 있다.
[의의와 평가]
6·25전쟁은 인적·물적 피해뿐만 아니라 주민간의 갈등과 민족 분단 의식의 고착화를 야기하였다. 이는 광명 지역뿐만 아니라 한국의 모든 국민들에게 현재까지 영향을 주고 있는 문제로, 남북 화해를 통한 평화적 민족 통일을 이루기 위해 극복해야할 시대적 과제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