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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명반탁운동 이전항목 다음항목
메타데이터
항목 ID GC03100410
한자 光明反託運動
영어의미역 Anti-trusteeship Movement
분야 역사/근현대
유형 사건/사건·사고와 사회 운동
지역 경기도 광명시
시대 현대/현대
집필자 양철원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성격 사회운동|반탁운동
발생[시작]연도/일시 1946년 1월 1일연표보기
종결연도/일시 1946년연표보기
발생[시작]장소 안양초등학교
관련인물/단체 인민임시자치회

[정의]

1945년 한반도 신탁 통치안에 대해 광명 주민들이 벌인 반대 시위.

[개설]

모스크바3상회의의 신탁 통치 결정이 국내에 알려지면서 전국적인 반탁 운동이 일어났으나, 좌익이 찬탁으로 입장을 바꾸면서 좌우익의 이념적 갈등이 심화되었다.

[역사적 배경]

1945년 12월 모스크바에서 미국·영국·소련 3국의 외상들이 모여 한반도 문제를 논의하고 5년 기한의 신탁 통치를 결정하였다. 보다 중요한 사항은 임시 정부 수립에 대한 합의였으나, 이러한 내용은 생략된 채 신탁 통치 실시만이 부각되어 국내에 알려지면서 전국적인 반탁 운동이 전개되었다.

[경과]

현재 광명 지역이 속해 있던 시흥군 지역에서의 반탁 운동은 좌익계에서 먼저 주도적으로 전개하였다. 인민위원회의 전신이라 할 수 있는 인민임시자치회 주최로 반탁 강연회가 시흥 군민 3,000여 명이 참석한 가운데 1946년 1월 1일 안양초등학교 대강당에서 열렸고, 이후 가두 행렬을 전개하였다. 좌익에 비해 조직화가 늦었던 우익 세력은 애국동지회를 중심으로 반탁 운동을 전개하였다. 애국동지회는 1946년 1월 12일 안양의 구 동방공장 회의실에서 반탁 강연회를 개최하여 신탁 통치를 단호히 배격할 것을 결의하고 가두시위를 벌였다.

[결과]

모스크바3상회의의 결정에 따라 개최된 1946년 1차 미소공동위원회가 결렬되고, 다음해 열린 2차 미소공동위원회 역시 결렬되자 미국은 한반도에서의 신탁 통치를 포기하고 한국 문제를 유엔에 이관하였다. 이에 따라 신탁 통치 문제가 사라지면서 반탁 운동은 공격 목표의 소멸로 명분을 잃고 소멸되었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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