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3100406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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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現代 |
영어의미역 | Present Age |
분야 | 역사/근현대 |
유형 | 개념 용어/개념 용어(일반) |
지역 | 경기도 광명시 |
시대 | 현대/현대 |
집필자 | 양윤모 |
[정의]
해방 이후부터 현재까지의 경기도 광명 지역의 역사.
[개설]
시대 구분상으로 볼 때 일반적으로 현대는 1945년 이후를 출발선으로 본다. 광명 지역은 1974년 광명출장소가 되었다가 1981년 광명시로 승격되었다.
[행정구역의 변천]
1945년 일제 식민지에서 해방된 한반도는 38도선을 경계로 미국과 소련의 영향권에 들어가서, 남쪽의 경우 미군정이 유일한 합법 정부로 기능하였다. 광명 지역은 행정적으로 일제강점기와 거의 변화가 없었지만, 대한민국 정부가 재건된 이후 시흥군의 많은 지역이 서울특별시로 편입되는 변화를 거쳤다. 그리고 1970년 6월 10일 시흥군 조례 제199호에 의해 서면 광명리와 철산리의 2개 법정리를 관할 구역으로 하는 서면 광명출장소가 설치되었다.
1974년 6월 1일에는 시흥군 조례 제401호에 따라 서면 광명출장소가 시흥군 광명출장소로 승격되었고, 1976년 4월 20일 7개의 분소(分所)가 설치되었다. 이어 1981년 7월 1일에는 법률 제3425호에 의해 소하읍과 광명출장소가 광명시로 승격되어 시흥군에서 완전히 분리되었다. 그러므로 광명시의 현대는 광명출장소가 설치된 1970년부터 시작되었으며, 본격적으로는 광명시가 탄생한 1981년 7월 1일부터 시작된다고 하겠다.
[광명출장소 시대]
광명시가 본격적으로 성장하게 된 것은 인구의 증가가 큰 역할을 하였다. 인구의 증가는 부족한 교육 시설 설립을 촉진하는 한편 교육 인구 유입을 초래하였다. 무엇보다도 인구의 증가로 큰 변화를 맞은 것은 거대 시장이 형성되었다는 점이다. 1970년 광명시장이 개설되었으며, 이듬해에는 철산중앙시장이 새롭게 조성됨으로써 지역 상권이 크게 확대되어 상업의 발달을 촉진하게 되었다. 이에 따라 1971년과 1977년에 대규모 은행 지점이 개설되어 금융 활동 역시 발전할 수 있게 되었다. 여기에 1973년 기아자동차에서 서면 소하리에 자동차 생산 공장을 설립하면서 광명 지역 경제에 큰 역할을 담당하였다.
그런데 1970년대에 펼쳐진 수도권 그린벨트 정책에 따라 광명 일부 지역의 개발이 제한됨으로써 도시의 균형 발전에 악영향을 미치게 되었다. 주택 개발이 골고루 이루어지지 못하면서 시흥군 이래 서면의 중심지 역할을 하던 소하리 일대의 인구 유입이 크게 제한되었다. 반면 철산리와 광명리를 중심으로 대단위 아파트 단지가 조성되면서 이 지역은 광명 지역의 중심 지역으로 부상하였다. 특히 광명사거리에 조성된 주공아파트는 경기도 최초의 아파트 단지로 기록되어 있다.
또한 광명출장소에서 광명시로 승격되는 기간 동안 인구의 급증으로 인한 문제가 크게 대두하였다. 개발 시대 대한민국의 전반적인 문제점이기도 하였지만, 우선 도시 기반 시설이 제때 이루어지지 못함으로써 안양천의 범람으로 광명 지역이 입은 피해는 대단히 컸다. 특히 1977년 7월 9일 기습적으로 내린 폭우로 인해 철산리 일대가 물바다로 변하면서 1,705가구 9,000여 명의 주민이 수난을 당하였다.
안양천 범람 문제는 1990년대에 들어와서야 어느 정도 해결을 보게 되었다. 그리하여 광명출장소 시기 광명 지역은 도시 계획에 따른 자체적인 성장이라는 면에서는 크게 미흡하였다. 이는 서울이라는 거대 도시에 둘러싸인 수도권의 여타 지역에서도 공통적으로 겪었던 문제이기도 하였다. 다만 광명 지역의 경우는 광명출장소에서 광명시로 개편되는 과정에서 연평균 20% 이상의 인구 증가율을 보이면서 다른 수도권 지역보다 열악한 도시 환경에 처해 있었다고 할 수 있다.
[광명시 시대]
늘어나는 인구와 도시 기반 시설의 정비 그리고 그에 따른 새로운 행정 시스템에 대한 요구로 1981년 7월 1일 광명시가 탄생하였다. 실로 광명 지역이 역사 무대에 등장한 지 1500여 년 만에 독립적인 행정 구역과 이름을 갖게 된 것이다. 광명시 개청 때의 인구는 15만 3997명이며, 면적은 36.46㎢로, 7개의 법적동과 15개의 행정동 그리고 168통 1,252반으로 행정 조직이 구성되었다.
광명시가 출범함에 따라 도시 기반 시설 역시 크게 개선되었다. 특히 광명시민의 삶의 질을 크게 개선시킨 것 중 하나가 1983년 상수도의 전면적인 개통이었다. 또한 광명시 주민의 80% 이상이 서울에 생활 근거지를 두고 있는 지역 특성상 주택 문제를 해결하는 것이 당면 과제였다. 이에 따라 1983년부터 철산지구개발계획이 착수·시행되어, 43만 7,000여 평[1.44㎢]의 대지에 7,100여 호 규모로 현대적인 시설을 완비한 주택이 공급되었다. 또한 철산동 및 하안동 지역에도 택지 개발이 빠르게 진행되었다.
그리하여 1992년까지 철산동 8,600세대와 하안동 2만 2,000세대의 대규모 아파트단지가 조성되었다. 특히 주목할 만한 것은, 이 중 하안동에 들어선 3,284호는 영구 임대 주택으로 조성되어 저소득층의 주거 안정에 크게 기여했다는 점이다. 이러한 시책은 중산증과 서민층이 같은 단지 내에 거주함으로써 계층 간의 위화감을 해소한다는 차원에서 선구적인 정책으로 주목받고 있다.
한편, 2000년대 들어와서 광명시는 도시 발전에 새로운 전기를 맞게 되었다. 2000년 2월 29일 지하철 9호선 일부 구간을 시작으로 8월 1일에는 전 구간이 개통된 것이다. 광명시에는 광명사거리역과 철산역이 개설되어 시민들의 교통 생활은 물론이고 서울과 인천으로의 접근성이 향상되었을 뿐만 아니라, 급속한 인구 증가와 승용차의 폭발적인 증가로 인한 출퇴근길 정체 현상도 크게 개선되었다. 이와 함께 KTX 광명역의 등장으로 전국 어디에서나 빠른 시간 내에 왕복이 가능한 교통 생활을 영위하게 되어 광명시는 명실상부 수도권의 교통 중심지로 자리매김하게 되었다.
1970년대 출장소에서 1980년대 시로 개편된 광명 지역은 2010년 현재 33만 인구를 가진 도시로 성장하였다. 그럼에도 광명시는 주택 및 교육 문제를 비롯해서 도로·문화 시설 확대와 근린공원 확대 등 아직 갈 길이 먼 것도 사실이다. 그렇지만 1990년대 지방 자치제의 전면적인 실시로 시민의식이 날로 높아지고 있고, 삶의 질을 고도화하는 데 민관(民官)이 적극적으로 소통하고 있으므로 광명시는 그 어느 도시보다 안정되고 균형 잡힌 지역으로 성장하게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