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310040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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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始興靑年會 |
영어의미역 | Siheung Youth Association |
분야 | 역사/근현대 |
유형 | 기관 단체/기관 단체(일반) |
지역 | 경기도 광명시 |
시대 | 근대/일제 강점기 |
집필자 | 양철원 |
[정의]
일제 강점기 경기도 광명 지역에서 활동한 청년 단체.
[개설]
3·1운동 이후 일제의 식민지 지배 정책이 소위 문화 정치로 바뀌면서 외형적으로 언론, 집회, 결사의 자유가 보장되었고 전국적으로 많은 단체들이 결성되어 활발하게 민족 운동을 전개하였다. 경기도에서도 3·1운동 이후 1920년대 말까지 178개의 청년 단체가 20개 군에서 결성되었다. 이 가운데 시흥 지역에서는 13개의 청년 단체가 활동하였다. 광명 지역에서 직접 결성된 청년 단체는 확인되지 않으나, 서면 소하리의 노동 야학 등 청년 단체들이 주도했던 활동이 있었던 만큼, 시흥청년회를 비롯한 시흥군의 여러 청년 단체가 광명 지역에도 영향을 주었을 것으로 여겨진다.
[변천]
시흥청년회에 대해서는 두 가지 자료가 있는데, 각각 창립 연대가 다르게 기술되어 있다. 한 자료에 따르면, 시흥청년회는 1924년 7월 15일에 창립된 것으로 되어 있다. 창립 후 사무소를 시흥군 동면 시흥리에다 두고 환등(幻燈)순회강연, 수해구제사업 등 여러 가지 사회사업 활동을 하였다. 그러나 간부들이 흩어져 자주 모이지 못하고 활동이 뜸해지자 활동 재개를 위해 1926년 7월 20일에 정기총회를 열고 임원을 개선하였다.[『동아일보』, 1926년 10월 5일 순회탐방란]
또 한 자료에 따르면, 당시까지 시흥군 영등포에 청년회가 창립되지 않았음을 유감으로 생각하던 김태준(金泰準)의 발기로 1928년 3월 25일 오전 11시경에 영등포보통학교 내에서 시흥청년회 창립총회가 개최된 것으로 되어 있다. 창립총회에서 여러 가지 사항을 결의하고, 다음과 같이 임원을 선정하고 오후 2시경 폐회하였다. 회장 김태준, 부회장 이창운(李昌雲), 총무 홍순기(洪順基), 회계 노윤진(盧允鎭), 서무부장 유병석(劉秉錫), 지육부장 박호영(朴鎬永), 권농부장(勸農部長) 최영춘(崔榮春), 서기 홍종화(洪鍾華) 1인 외 간사 4명이었다.[『동아일보』, 1928년 3월 29일]
시흥청년회는 1924년 7월 15일에 창립되었으나 활동이 부진하여 1926년 7월 20일 활동 재개를 위한 정기총회를 열어 임원진까지 개선했으며, 이 역시 유야무야 되어 버리자 1928년 3월 15일에 다시 창립된 것으로 추정된다.
[의의와 평가]
3·1운동 이후 1920년대에 들어 활발하게 전개된 청년 운동은 초기에는 사회 개량주의적 문화 운동이 주류를 이루다가, 1924년 조선청년총동맹 결성 이후 사회주의 노선이 새로운 지도 이념이 되어 청년 운동을 주도하였다. 이에 따라 청년 단체 조직도 회장제에서 위원장제로 변화하며 조직을 강화하는 경향이 있었다. 이에 반해 시흥청년회는 1928년경에도 중앙집권적인 회장제를 유지하고 있어 이 지역에서 사회주의 운동이 강세를 보이지 않았다는 사실을 짐작하게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