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310039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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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韓日議定書 |
영어의미역 | Korea and Japan Protocol |
이칭/별칭 | 대조선대일본양국맹약 |
분야 | 역사/전통 시대 |
유형 | 개념 용어/개념 용어(일반) |
지역 | 경기도 광명시 |
시대 | 근대/개항기 |
집필자 | 안홍민 |
[정의]
1904년 제2차 시흥농민봉기의 간접적 원인이 된, 한일간 체결한 외교 문서.
[개설]
한일의정서는 1894년 청일전쟁에서 승리함으로써 조선의 식민지 지배에 배타적 우위를 확보한 일제가 러일전쟁 중인 1904년 2월에 무력으로 조선에 강요한 협약서이다. 이를 ‘대조선대일본양국맹약’이라고도 한다. 한일의정서로 일제는 조선에 대한 정치적·군사적 간섭을 합법화하였으며, 그 결과 광명 지역의 토지가 일본 군사작전 지역으로 편입되었다. 한일의정서는 1904년 9월 14일 제2차 시흥농민봉기가 일어나는 간접적 계기가 되었다.
[내용]
일본은 러일 교섭의 회담이 진행 중인 1903년 10월부터 한일의정서 체결을 시도했다. 주한 일본공사 하야시 곤스케[林權助]는 1903년 10월부터 매수 공작금을 투입하여 이지용(李址鎔)·민영철(閔泳喆)·이근택(李根澤) 등을 조종하면서 일을 추진시켜, 1904년 1월에는 공수동맹의 성격을 띤 밀약이 조인 직전에까지 이르렀다. 이에 대한제국 정부는 1월 23일 국외중립선언으로 피하려고 했지만 러일전쟁의 발발로 실패했다.
2월 9일 일본군은 인천에 상륙하여 곧바로 서울로 들어오자, 하야시는 고종을 만나 의정서의 체결을 강요했다. 의정서 체결에 반대하던 탁지부대신 겸 내장원경 이용익(李容翼)을 납치하여 일본으로 압송하고, 보부상의 핵심인 길영수(吉永洙), 육군참장 이학균(李學均), 육군참령 현상건(玄尙建) 등을 연금한 뒤 2월 23일 외부대신 이지용과 일본공사 하야시 사이에 전문 6조의 한일의정서가 체결되었다.
[의의와 평가]
한일의정서로 광명 지역의 토지가 일본의 군사작전 지역에 편입됨에 따른 일본의 횡포에 농민들은 많은 피해를 입게 된다. 결국 한일의정서는 비록 간접적이기는 하지만 제2차 시흥농민봉기에서 광명 지역의 농민이 봉기를 일으키게 된 원인이라고 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