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310038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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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二次始興農民蜂起 |
영어의미역 | Peasant's Uprising of Siheung |
이칭/별칭 | 2차 시흥농민운동,2차 시흥농민항쟁 |
분야 | 역사/근현대 |
유형 | 사건/사건·사고와 사회 운동 |
지역 | 경기도 광명시 |
시대 | 근대/개항기 |
집필자 | 안홍민 |
[정의]
1904년 광명 지역에서 일어난 농민봉기.
[역사적 배경]
1904년(고종 41) 러일전쟁의 전운이 감도는 가운데, 그해 1월 조선 정부는 국외 중립을 선언하게 된다. 하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일본은 강제적으로 한일의정서를 채택, 한-러 간에 맺은 모든 조약을 폐기시키는 한편 전쟁 수행을 위한 철도를 착공하고 통신망을 강점하였다. 이러한 상황 아래 1904년 9월 일본은 병참 기지와 철도 건설을 위한 역부를 강제 모집하기에 이른다.
이에 앞서 경기도 시흥군[지금의 광명시]에서는 1901년 9월 1일 경부선의 일부 구간인 영등포~수원 사이의 공사가 착수되면서, 그 과정에서 역부의 저렴한 임금과 철도 부지의 무상 수용에 저항하는 사태가 발생한 바 있다. 이는 앞으로 닥쳐올 대규모 봉기의 불씨가 이미 전부터 싹트고 있었음을 뜻한다.
[목적]
일본의 병참 기지와 철도 건설을 위한 역부 강제 모집에 대응하여 역부 모집의 부당성을 주장하고, 중지를 요구할 목적으로 발생하였다.
[발단]
1904년 일본은 조선 정부를 압박해 러일전쟁 수행에 필요한 한국인 역부를 강제로 동원하고자 하였다. 당시 시흥군에는 80명의 역부가 배정되었는데, 이에 군수는 각 면의 집강들을 소집하여 이에 대한 협조를 구하였으나, 그들은 역부 모집의 부당성을 주장, 즉각 중지를 요구하였다. 결국 군수는 이러한 상황을 관찰부에 보고하였고, 관찰부는 군의 사정을 참작하여 30여 명의 역부만 충원토록 하였다.
그러나 일본군의 압력을 받은 내부에서 또 다시 21명의 역부를 다시 충원해 줄 것을 요구했고, 이에 농민들의 반항을 예상한 집강들이 피신하면서, 관에서 직접 역부의 경제 모집을 계획하게 된다. 결국 이 소식을 들은 농민들은 향회를 열어 이를 철회해 줄 것을 요청하는 한편, 만일 이 요청이 받아들이지 않는다면, 집단행동으로 옮길 것을 결의하게 된다.
[경과]
관에서의 역부의 강제 모집 계획이 알려지자, 집강을 중심으로 한 농민들은 이에 대항할 계획을 세웠다. 먼저 8월 중순부터 퇴리(退吏) 김원록(金元祿)에게 역부 모집에 야기되는 각종 문제점을 『황성신문』에 투고하도록 하였다. 김원록은 전(前) 주사(主事) 남중희(南重熙)의 대필로 작성된 원고를 마침 채무 관계로 읍내에 와 있던 이기춘(李奇春)에게 신문사에 전달해 줄 것을 의뢰하였다.
그런데 이기춘은 이를 다시 읍내의 이명수(李明秀)를 만나 대신 전해줄 것을 부탁하였고, 이명수는 원고의 내용이 역부 모집의 부당성과 시행을 둘러싼 관아의 비리에 관한 투서임을 알고 관아에 밀고하였다. 결국 9월 10일 김원록은 순교청, 남중희는 경무청에 각기 수감된다. 9월 13일 신문 투고 계획이 실패로 돌아가자 집강들은 읍내의 한천교(寒川橋)에서 취회하자는 통문을 발송한다.
9월 14일 11시경 읍내의 한천교에는 각 면리에서 온 수천 명의 농민들이 운집하였고, 성우경의 사회로 집회가 시작되었다. 오후 3시경 각 집강들이 농민들을 이끌고 관아로 진입하였다. 그러나 관속배는 미리 도망했고, 이미 대기하였던 30여 명의 일본인들이 관문을 폐쇄하고 칼을 휘둘러 농민들 가운데 부상자가 속출했다.
이에 분노한 농민들이 일제히 투석, 관문을 파괴하고 관아로 돌진해 들어갔다. 난입한 농민들은 군옥을 파괴하여 김원록 등의 죄수를 풀어주는 한편 관아와 집물을 모두 파괴하였다. 또한 역부 모집에 앞장선 수서기 이종렬, 사령 김영학의 집과 집기를 파괴하였다.
농민들이 관아로 난입하는 과정에서 군수 박우양과 그의 아들이 돌에 맞아 사망했고, 관아를 보호하던 일본인 중 2명이 사망하고 4명이 부상당하였다. 또한 농민 측에도 피해가 커서 남면 광명리 민금석 외 다수가 일본인에 의해 부상당하였다. 사태가 다급해지자 경기도 관찰부에서 다수의 순검을 파견, 이에 농민들이 해산하게 되었다.
[결과]
9월 15일 경기관찰사는 2차 시흥농민봉기의 개요를 외부대신에게 보고하였고, 이에 의정부참정 신기선은 관찰사의 보고를 상주하였다. 한편 일본인 사상자가 발생했다는 소식을 들은 일본공사 하야시는 당시 동대문 근처에 주둔하고 있던 후비대 200명을 급파했고, 진상 조사를 위해 관곡(關谷) 경부(警部)와 순사 3명, 그리고 헌병 장교의 인솔 아래 헌병 5명을 파견하였다.
일본군 후비대(後備隊)는 7, 8명 또는 10명을 한 조로 편성하여 군내의 마을을 순행하였는데, 특히 현지 거구 일본인을 앞세워 집강들을 우선적으로 체포, 군사령부로 압송하였다. 읍내의 감시가 엄중해지자 집강들은 남면 광명리에 모여 취회의 정당성과 향후의 대책을 논의, 역부모집 중지 요청을 관찰부에 탄원기로 하였다.
그러나 이러한 시도는 청원서를 관찰부에 제출하기로 한 최영선(崔永先)이 도중에 체포되면서 실패하였다. 9월 16일 정부는 안핵사 안종덕을 현지에 파견, 진상을 규명하도록 하였다. 안종덕은 민란의 주창자는 퇴리 김원록이고, 군수 살해 책임자는 집강 성우경, 초군(樵軍) 하주명으로 결론지었다.
10월 26일 평리원에서 재판이 진행되었다. 김원록은 변란죄로 사형, 성우경과 하주명은 협박죄로 각각 무기징역과 15년형이 선고되었다. 김원록은 바로 교수형에 처해졌고, 성우경과 하주명은 각각 15년형과 10년형으로 감형되었다. 한편 일본공사는 일본인 사상자 2명, 부상자 4명에 대한 진휼금을 요구하였고, 정부는 3,232원을 일본 공사관을 통해 지급하였다.
[의의와 평가]
제2차 시흥농민봉기는 일본인의 역부 강제 모집과 지방관의 고압적인 태도에 반발하여 발생한 저항 운동으로, 일제의 침략과 관련한 시흥 군민의 항일 의식이 강하게 표출된 사건이다. 특히 향회를 개최하여 향촌민들의 의견을 효과적으로 수령하였다는 점에서 근대적인 농민 의식의 성장을 찾아볼 수 있다.
또한 향회의 취회 과정에서 공동체의 강제력을 발휘하여 동원 체제의 실효성을 달성하였고, 각 면의 집강들을 통해 농민들을 조직적으로 동원하였다는 점도 주목할 만하다. 아울러 역부 모집의 부당성을 『황성신문』을 통해 대외에 알리고자 하였다는 점은 우리나라 근대 농민 운동사에서 최초로 시도된 방법이라 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