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3100005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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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光明-詩-永遠-靑年詩人奇亨度 |
분야 | 구비 전승·언어·문학/문학 |
유형 | 개념 용어/개념 용어(기획) |
지역 | 경기도 광명시 |
시대 | 현대/현대 |
집필자 | 김상철 |
[스물아홉 천재 시인 기형도의 삶]
시인 기형도(奇亨度)는 1960년 2월 16일 경기도 옹진군 연평면[현 인천광역시 옹진군 연평면]에 딸린 연평도에서 3남 4녀 중 막내로 태어났다. 1964년 일가족이 시흥군 소하리[현 경기도 광명시 소하동 706-1번지]로 이사하였다. 당시 소하리는 급속한 산업화에 밀린 철거민과 수재민들의 정착지였으며, 도시 배후의 근교 농업이 성한 농촌이었다. 기형도는 돼지 치는 집 막내아들로 소하리란 공간에서 유년기과 청소년기를 보내며 시의 자양분을 얻어 낸다. 기형도의 어린 날은 다락방 속 헌 책들로 인해 행복했으며, 그에게 유일한 ‘사교육’은 바로 독서였다. 광명에서의 유년 시절 체험은 기형도에게 중요한 시적 모티프를 제공해 주었으며, 후에 이곳에서의 체험을 뛰어난 작품으로 형상화한다.
1969년 아버지가 중풍으로 쓰러진 후, 경제적으로 어려워지자 어머니가 대신 생계를 꾸려가기 시작한다. 1975년 바로 위의 누이가 불의의 사고로 죽는다. 누이의 죽음은 기형도의 일생에 깊은 상흔을 남기게 된다. 이 무렵부터 기형도는 시를 쓰기 시작한다. 중학교와 고등학교를 우수한 성적으로 졸업한 기형도는 1979년 연세대학교 정치외교학과에 입학하였고, 문학 동아리인 연세문학회 가입을 계기로 본격적인 작품 활동을 하게 된다.
1982년 연세대학교 윤동주문학상에 시 「식목제」가 당선되며 문학적 재능을 인정받기 시작하였다. 1985년 대학을 졸업하고, 같은 해 『동아일보』 신춘문예 시 부문에 「안개」가 당선되며 문단에 데뷔하였다. 1984년 중앙일보사에 입사한 그는 정치부와 문화부, 편집부 기자로 일하는 틈틈이 작품을 발표하였다. 『문학사상』에 「어느 푸른 저녁」[1985년 12월호]과 「식목제」[1987년 4월호], 「여행자」·「장미빛 인생」[1987년 9월호], 「흔해빠진 독서」·「노인들」[1988년 5월호], 「바람의 집-겨울 판화 1」·「삼촌의 죽음-겨울 판화 4」[1988년 11월호] 등을 발표하고, 『문학과사회』에 「정거장에서의 충고」·「가는 비 온다」·「기억할 만한 지나침」[1988년 겨울호] 등을 발표하였다.
시집 출간을 준비하던 기형도는 1989년 3월 7일 종로3가의 한 극장 안에서 숨진 채 발견되었다. 사인은 뇌졸중으로 알려져 있다. 만 스물아홉의 생일을 엿새 앞둔 기형도 시인은 젊은 나이로 갑작스럽게 우리의 곁을 떠나고 말았다. 그야말로 요절(夭折)이었다. 그러나 시인의 요절과 죽음의 그림자가 짙게 드리워진 그의 시집은 역설적이게도 ‘기형도 신화’를 빚어내는 단초가 되었다.
1989년 5월 기형도의 갑작스런 죽음을 안타까워하던 소설가 성석제, 문학평론가 이영준 등 지인들이 유고를 모으고, 기형도 시의 해설을 맡았던 평론가 김현이 제목을 붙인 유고 시집 『입 속의 검은 잎』이 간행되었다. 그리고 이 시집으로 인해 그는 우리에게 너무나 아까운 시인으로 다가오기 시작하였다. 이후 그에 대한 관심이 폭발하면서 1990년 3월에 기형도의 1주기를 맞아 소설과 편지, 단상 등이 수록된 산문집 『짧은 여행의 기록』이 발간되었다.
1999년 기형도의 10주기를 맞아 추모 문집인 『사랑을 잃고 나는 쓰네』와 그를 아끼는 문인들이 『기형도 전집』을 간행하였다. 2009년에는 20주년 추모 문집 『정거장에서의 충고-기형도의 삶과 문학』을 간행하였다. 유고 시집 『입 속의 검은 잎』을 간행하는 데 주도적인 역할을 했던 성석제를 비롯하여 원재길, 조병준, 이영준, 후배 기자 박해연, 이광호 등이 20주기 기념 문집 작업을 함께 하였다.
기형도 시인은 4세 때 시흥군 소하리[현 광명시 소하동 KTX 광명역사 인근]로 이사를 와 타계할 때까지 광명에서 유년기와 청년기를 보냈다. 그의 광명 체험은 그의 대표작이라 할 「안개」, 「엄마생각」 등의 작품에 짙게 반영되어 있다. 그는 현재 경기도 안성시에 있는 천주교 공원묘지에 묻혀 있다. 묘비에는 세례명인 ‘그레고리오’란 이름이 새겨져 있다. 기형도의 무덤은 문학을 동경하고 시를 꿈꾸는 이들에게 일종의 성지가 되었다. 2006년 6월 경기도 광명시 하안1동 광명시 실내체육관 앞 야외공원에 그의 시 「어느 푸른 저녁」이 새겨진 시비가 세워져 그를 기리는 사람들의 발길을 잡아끌고 있다.
[그로테스크한 리얼리즘의 세계를 창조하다]
기형도는 살아 있을 당시에는 크게 주목받지 못했으나 사후에 발표된 시집을 통해 널리 이름을 알렸다. 문학평론가 김현은 그의 작품 세계를 ‘그로테스크 리얼리즘’이라 일컬었다. “그의 시가 그로테스크한 것은, 타인들과의 소통이 불가능해져, 갇힌 개별자의 비극적 모습이 마치 무덤 속의 시체처럼 뚜렷하게 드러나 있다는 데에 있다. 시인은 그의 모든 꿈이 망가져 있음을 깨닫는다.” [『입 속의 검은 잎』의 해설에서 발췌]
그의 시는 낯설고 우울하다. 어두운 이미지, 고독과 죽음에 직접 연결된 이미지들이 흔하게 쓰인다. 하지만 먼 곳의 이야기를 하지 않는다. 그의 시는 현실의 세계를 평소 우리가 사용하는 언어로 자주 이야기한다.
그 해 늦봄 아버지는 유리병 속에서 알약이 쏟아지듯 힘없이 쓰러지셨다. 여름 내내 그는 죽만 먹었다. 올해엔 김장을 조금 덜 해도 되겠구나. 어머니는 남폿불 아래에서 수건을 쓰시면서 말했다. 이젠 그 얘긴 그만하세요 어머니. 쌓아 둔 이불에 등을 기댄 채 큰누이가 소리 질렀다. 그런데 올해에는 무들마다 웬 바람이 이렇게 많이 들었을까. 나는 공책을 덮고 어머니를 바라보았다. 어머니. 잠바 하나 사 주세요. 스펀지마다 숭숭 구멍이 났어요. 그래도 올겨울은 넘길 수 있을 게다. 봄이 오면 아버지도 나으실 거구. 풍병(風病)에 좋다는 약은 다 써 보았잖아요. 마늘을 까던 작은누이가 눈을 비비며 중얼거렸지만 어머니는 잠자코 이마 위로 흘러내리는 수건을 가만히 고쳐 매셨다.[「위험한 가계·1969」에서]
열무 삼십 단을 이고/ 시장에 간 우리 엄마/ 안 오시네, 해는 시든 지 오래/ 나는 찬밥처럼 방에 담겨/ 아무리 천천히 숙제를 해도/ 엄마 안 오시네, 배추잎 같은 발소리 타박타박/ 안 들리네, 어둡고 무서워/ 금간 창 틈으로 고요히 빗소리/ 빈방에 혼자 엎드려 훌쩍거리던// 아주 먼 옛날/ 지금도 내 눈시울을 뜨겁게 하는/ 그 시절, 내 유년의 윗목 -「엄마 생각」
「엄마 생각」에서 “~찬밥처럼 방에 담겨”와 같은 표현은 신선하게 느껴지면서도 무척이나 현실적이다. 어린 시절 혼자서 집을 지키며 엄마를 기다려 본 기억이 있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쉽게 그 정서에 공감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는 한편 우리는 조용한 서정성을 느낄 수 있다. 그의 시는 어둡고 우울하지만 결코 폭력적이지 않다. 처연하게 느껴지거나, 심지어 담담하기까지 한다.
기형도는 그로테스크 리얼리즘이라는 독특한 시 세계를 열어, 가난·상실·도시적 일상에 대한 부정적 인식, 실존의 부조리 등을 우리 사회에 대한 비판적 표지로 읽어내게 하는 새로운 경향을 형성했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기형도를 기억하다]
1. 이문재[시인]
기형도의 부재는, 90년대 내내 살아남은 자들을 감시했다. 90년대에 시를 쓰기 시작했다는 것은 기형도를 의식하지 않을 수 없었다는 말과 같다. 80년대에 시를 쓰기 시작한 우리 세대들이 이성복과 황지우를 ‘애비’로 삼았듯이 90년대에 문학을 시작한 세대들에게 기형도는 ‘강요된, 혹은 선택된 애비’였다. 기형도가 부재로써 강렬하게 살아 있었다는 근거가 바로 여기에 있다.
인사동에서, 광화문에서, 시집의 앞뒤에서, 90년대 문학의 중심과 주변에서 기형도, 아니 기형도 현상은 하나의 숙제였다. 언제나 애정과 편견, 분석과 해석이 넘쳤다. 그동안 추모시를 쓰지 못해서 그 논의에 끼어들 수 없었던 나는 이제 겨우, 다음과 같이 몇 줄을 쓸 수 있을 것 같다. “기형도는 죽었다, 그러나 시인은 죽지 않았다, 그런데 시는 죽었다, 이제 기형도는 정말 죽었다. 그리하여 그의 시는 온전하게 시로서 살아나게 되었다.”라고. 그가 죽어야 그의 시가 제대로 읽힌다.
이 글을 넘기고 나는 친구들과 함께 경기도 안성 천주교 묘지로 간다. 가서, 차고 투명한 소주를 한잔 붓고 들이킬 것인데, 이제는 그 술에다 그리움, 미안함, 안타까움 따위를 섞지 않겠다. 대신 새 봄을 맞는 봉분의 맑은 풀들에게 말하겠다. “가엾은 내 사랑 빈집에서 나왔네.” 가여웠던 그의 시가, 마침내 ‘기형도의 빈집’에서 나오게 됐다고, 그의 10주기가 바로 그의 시의 새로운 생일이라고, 나는 그의 치열하고 매혹적이었던 부재를 향하여 말하려는 것이다.
2. 장우석 - 기형도 20주기에 바라보는 한 늙은 문청의 추억담
기형도 시인이 세상을 떠난 지 20년이 흘렀다. 1989년 3월 7일 새벽, 서울 종로의 한 심야 극장에서 숨진 채 발견된 그의 사인은 뇌졸중. 만 29세 생일을 엿새 앞두고 있었다고 한다.
그는 그 해 가을 문학과지성사에서 첫 시집을 내기로 되어 있어서 열뜬 마음으로 시집에 실릴 시들을 다듬는 한편, 시집의 구성에 대해서도 신중하게 고민했었다. 그가 생전 그토록 갖고 싶어 했던 첫 시집은 유고 시집이 되어 그의 지인들의 도움으로 그 해 5월 말 세상에 나왔다. 그 후 그 시집은 한국 문학의 신화가 되었다.
내가 가지고 있는 『입 속의 검은 잎』은 초판 11쇄로 1990년 11월에 발행된 것이다. 가격은 2,500원. 그러니까 나는 이 시집을 고등학교 1학년이었던 1992년 한 친구에게 선물을 받았다. “네가 읽어보면 좋아할 거 같아서.” 하지만 기형도를 이해하기엔 그때 나는 너무 어렸고 또 세상을 잘 알지 못했다.
그렇게 얄팍한 독서로 기형도를 알고만 있던 나는 별 저항 없이 대학에 들어갔다. 정치외교학과. 고 김남주와 박노해, 창비[창작과비평사의 약칭]와 실천문학사의 시집들이 외쳐대는 전투적 목소리 속에서 뜻밖에 나를 위로했던 것은 다름 아닌 기형도였다.
그 시절 “그토록 좁은 곳에서 내 사랑을 잃었던” 나는 “이 세상에 같은 사람은 없”음을 아프게 깨닫곤 “장님처럼 더듬거리며 문을 잠그”고 “빈 집에 갇혀” 울었다. 또 “플라톤을 읽”으며 “감옥과 군대로 흩어”지는 선배와 친구들을 바라볼 수밖에 없었던 나는 “존경하는 교수가 있었으나 그분” 역시 “원체 말이 없”으셨다. “몇 번의 겨울이 지나자” 나 역시 “외톨이가 되었”고 “졸업이었”지만 “대학을 떠나기가”그처럼 나도 “두려웠다”.
그렇게 나 역시 쫓기듯 군 입대를 했던 1999년의 어느 날, 행정반을 정리하던 나는 문득 한 석간신문 하단에서 10주기에 맞춰 『기형도 전집』이 나왔다는 광고를 보았다. 이등병 주제에 나는 외출을 나가는 한 선임에게 ‘목숨을 걸고’ 혹시 이 책을 구해 줄 수 있냐는 부탁을 했다.
그런데 뜻밖에 선임은 순순히 구해 주는 것이 아닌가.[지금도 고맙게 생각한다] 떨리는 마음으로 딱딱한 표지를 넘기자 그의 흑백 사진이 나왔다. 기분이 이상했다. 거의 8년 동안 오직 예순한 편의 시와 이제하가 그린 시인의 캐리커처로만 알고 있던 기형도의 얼굴을 처음으로 본 것이다. 그리곤 곧 더 많은 기형도가 쏟아져 나왔다.
전집을 통해 알게 된 1주기와 5주기에 각각 나온 유고 산문집[『짧은 여행의 기록』]과 추모 문집[『사랑을 잃고 나는 쓰네』]도 곧 헌책방을 다니며 구해 읽었다. 그러면서 기형도가 생전에 동인으로 있었던 [시운동], 대학친구 성석제와 원재길, 그리고 조병준 등이 펴낸 시집이랄지 산문집 따위를 죄 구해다 읽기 시작했다.
제대 후 2004년엔 ‘목요북까페’라는 모임에서 『입 속의 검은 잎』 합평회를 열기도 했고, 여행기 「짧은 여행의 기록」에 나오는 대구의 ‘장정일 소년’을 우연히 만나 기형도에 얽힌 풍문들에 대해 조심스레 묻기도 했다. 그리고 그 해 한 포털 사이트에 기형도 추모 카페[기형도, 기억할 만한 지나침]도 하나 개설했다.
이번에 기형도 20주기에 맞춰 유고 시집을 냈던 출판사에서 추모 문집 『정거장에서의 충고』가 나왔다. 그 중 기형도보다 어린 내 나이 또래의 젊은 시인들이 담담히 기형도를 추억하는 꼭지가 있어 흥미롭게 읽었다. 그러면서 내 책장 어딘가에 ‘꽂힌’ 기형도의 낡은 유고 시집을 오랜만에 꺼내 읽었다. 기형도를 처음 읽던 열 몇 살의 나에게 그토록 어려운 난수표 같았던 시인의 시들이, 이젠 어떤 구절들은 유치하기도 하고 치기어려 보이기도 한다. 나이가 든 것이다. 기형도가 죽었던 스물아홉보다 나는 네 해를 더 살았다.
기형도는 영원히 스물아홉으로 남아 나보다 어린 청년들을 만날 것이다. 내가 늙고 병들어 이 세상에서 사라진 후에도 영원할 그를 나는 본다.
3. 김근[시인]
내가 처음 기형도를 알게 된 것은 그의 산문집 『짧은 여행의 기록』을 통해서였다. 그가 죽은 지 1년 뒤인 1990년에 출간된 산문집이었다. 우연히 구하게 된 그 책의 저자가 벌써 일 년 전에 죽었고 하필 그 산문집 제목이 ‘짧은 여행의 기록’이었다. 이 상징적인 책의 제목은 내겐 무척 매혹적이었다. 게다가 그 책의 저자가 요절 시인이라니.
문학 소년이었던 열아홉 살인 나도 어쩌면 그때 요절을 꿈꾸었을지 모른다. 어리고 감상적인 마음에 어쩐지 시인은 요절해야 하는 존재로만 여겨졌을지 모른다. 책의 표지에는 그의 흑백 사진이 인쇄돼 있었는데, 어쩐지 처연하게 웃는 양이 쓸쓸해 보여서 굳이 약력을 펼쳐 보지 않더라도 그 사진은 영정 사진처럼 보였다. 영정 사진은 어쩐지 그래야 한다고 나는 생각했던 것 같다.
그때 나는 고3이었다. 지금만큼은 아니었을지 모르겠지만, 그때도 고3은 힘겨운 시절이었다. 게다가 우리에겐 전교조[전국교직원노동조합의 약칭]의 상처가 가슴에 여전히 남아 있는 채였다. 이따금 소읍의 구석진 곳에 있는 전교조 사무실에서 해직된 선생님들을 만나곤 했다. 그러나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은 거의 없었다. 고3은 내게 그런 상처를 애써 외면하기를 강요했다.
자율 학습까지 모두 끝내고 퀴퀴한 냄새로 가득찬 독서실에 돌아와 내가 하는 일이라곤 기형도의 산문집을 펼쳐 드는 일뿐이었다. “희망은 있는가, 있을 것이다. 그것이 없다면 이 도저한 삶과 삶들, 이해할 수 없는 저 사람들은 오래전에 나에겐 부재했을 것이다. 나에게 희망은 어떤 모습일까.” 그런 구절을 읽으며 알 수 없는 일기에 골몰하기를 매일 밤 반복했던 나날이었다.
기형도의 유고 시집 『입 속의 검은 잎』을 읽은 건 대학에 합격하고 나서였다. 문예창작학과에 입학한 나는 어쩔 수 없이 우울한 군상들과 마주할 수밖에 없었다. 나도 마찬가지였지만 시를 쓰는 동기들은 모두 기형도를 앓고 있었다. 더러는 학교에서 가까운 기형도의 묘소에 다녀오기도 했고, 더러는 “사랑을 잃고 나는 쓰네// 잘 있거라, 짧았던 밤들아/ 창밖을 떠돌던 겨울 안개들아/ 아무것도 모르던 촛불들아, 잘 있거라 …”[「빈집」] 같은 구절들을 술자리에서 읊조리기를 주저하지 않았다. 또 누군가는 기형도의 시풍을 흉내 내어 그에 관한 시를 쓰기도 했다.
그러나 그해 봄 우리는 거의 매일 거리에 있었다. 나와 같은 학번이기도 했던 강경대가 공권력의 폭력으로 죽은 뒤 많은 사람들의 죽음이 이어졌다. 집에 돌아와 머리를 감으려고 고개를 숙이면 머리카락에서 우수수 최루탄 가루가 떨어지곤 했다. 우리는 시대의 절망을 뛰어넘으려고 했으나 그 해 봄이 지나자 우리에겐 우리가 어찌해 볼 수 없는 더 큰 절망이 찾아왔다.
이제 갓 스물을 넘긴 문학도들의 감수성만으로 가득 채우기에도 모자랐던 가슴은 심하게 훼손된 채 너덜너덜해져 버렸다. 그때 기형도는 그 너덜너덜해진 가슴에 위로가 되어 주었다. 그의 시는 현실을 도피한 자가 만나는 언어가 아니라 우리가 끝끝내 놓치고 싶지 않았던 감성의 보루였다.
생각해 보면 그의 시는 삶의 절망적인 순간마다 어떤 위로의 얼굴로 마주하게 되었다. 그가 죽은 뒤 20년이 지난 지금, 나는 그의 시에 뿌리 내린 도저한 죽음은 새로운 삶에 대한 열망은 아니었을까 다시 한 번 곰곰이 생각해 보게 된다.
[광명에서 영원히 기억될 기형도]
그동안 광명시에서는 기형도 시비 건립 및 시민들의 자발적인 모임인 기념사업회가 꾸려져 시낭송회나 강연회를 추진하는 등 기형도 시인 추모 사업이 지속적으로 이어져 왔다.
기형도 시인을 사랑하는 시민들의 모임은 2003년 기형도를 사랑하는 광명 시민들이 주축이 되어 결성한 자생적인 모임이다. 해마다 기형도 시인을 기리기 위한 ‘기형도 문학의 밤’을 열고 있으며, 광명에 남아 있는 기형도 시인의 문학정신을 계승하기 위한 활동을 지속적으로 벌이고 있다. 2006년에는 광명문화원과 광명 지역 문인들이 중심이 되어 광명시 실내체육관 내 잔디밭에 기형도 시비 건립과 함께 기념행사를 거행하였다.
2009년 3월 6일 기형도의 시 세계를 기리는 추모 20주기 행사가 경기도 광명시 주최, 주관으로 광명시민회관 소공연장에서 거행되었다. ‘시인 기형도 20주기 추모-어느 푸른 저녁의 노래’에서는 기형도의 시에 드러난 광명시 소하동의 풍경을 배경으로 만든 영상물 상영과 문단의 지인인 성석제, 장석주 등이 시인을 회상하는 자리가 마련되었다. 기형도 시인의 「엄마걱정」과 「쥐불놀이」를 노래로 만들어 불렀으며, 시 낭송과 그의 시 「봄날은 간다」를 탈춤으로 공연하는 행사를 가졌다. 또한 광명시가 기형도를 기리기 위해 작곡가 신형철에게 의뢰한 「어느 푸른 저녁」을 한국남성페스티발중창단이 부르기도 하였다.
기형도 시인학교는 경기도 광명의 대표적 시인인 기형도에 대한 추억을 음미하고 지역 문화 자산을 널리 확산시키고자 2009년 하안문화의 집에서 기획한 문화 예술 활동 사업이다. 기형도 시인학교는 ‘광명시가 배출한 기형도 시인의 추억을 음미하고, 나의 추억을 시로 다듬는 시간’을 주제로 2009년 4월 24일 입학식을 거쳐 봄 학기와 가을 학기로 나누어 진행되었다.
봄 학기에는 고운기, 김기택, 박철화 시인과 평론가들을 중심으로 시의 의미와 역사 등으로 진행하였고, 연출이 있는 시 낭송과 기형도 시인의 시에 직접 곡을 붙여 만든 노래도 배웠다. 가을 학기에는 기형도 시인의 흔적을 찾아 시인의 생가와 안양천 뚝방길 기행을 하였고, 참가자들이 직접 시를 쓰는 과정도 체험하였다.
끝으로, 우리들의 사랑을 가장 많이 받고 있으며, 그를 ‘기형도’이게 한 작품 「빈집」 전문을 통해 다시 한번 그를 기억해 보고자 한다.
사랑을 잃고 나는 쓰네//잘 있거라, 짧았던 밤들아/ 창밖을 떠돌던 겨울 안개들아/ 아무것도 모르던 촛불들아, 잘 있거라/ 공포를 기다리던 흰 종이들아/ 망설임을 대신하던 눈물들아/ 잘 있거라, 더 이상 내 것이 아닌 열망들아// 장님처럼 나 이제 더듬거리며 문을 잠그네/ 가엾은 내 사랑 빈집에 갇혔네
[영원한 청년, 시인 기형도를 읽다]
KBS 1TV ‘낭독의 발’에서는 ‘영원한 청년, 시인 기형도를 읽다’를 기형도 시인 20주기를 추모하는 낭독무대를 열었다.
스물아홉 나이에 세상을 떠난 시인 기형도의 20주기를 기념해 KBS 1TV ‘낭독의 발견’에서는 ‘영원한 청년, 시인 기형도를 읽다’를 주제로 문우들과 애독자들이 낭독에 참여하는 행사를 가졌다.
애독자인 29세의 청년 박지환은 누렇게 빛바랜 기형도 시집을 펼쳐들고 「질투는 나의 힘」을 낭독하였으며, 오랫동안 문학의 꿈을 간직해온 애독자인 이미란이 직접 쓴 자작시 「기형도를 읽는 밤」을 낭독하였다.
그리고 80년대 동인지 활동을 통해 기형도와 교류했던 시인 이문재는 "기형도 시인은 작품 속 검은 절망의 이미지와 달리 낭만적이고 유쾌한 성품이었다"라고 회고하면서 「먼지투성이의 푸른 종이」를 낭독하였다. 또 객석에 앉아 있던 기형도 시인의 초등학교 동창생인 여행 작가 송일봉도 만화 그리기를 즐겼던 소년 기형도의 어릴 적 사진을 보여주었으며, 함께했던 추억들도 생생하게 전해주었다. 소리꾼 이자람은 기형도 시인의 대표시 「빈집」을 노래하여 듣는 이의 심금을 울렸다.
프로그램의 끝부분에서는 이문재 시인이 자신의 산문 「기형도에서 중얼거리다」를 기형도 시의 독자들에게 전하는 형식으로 낭독하면서 마무리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