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광주광역시 북구 망월동 경열사에 있는 고려 후기 정지 장군의 행적을 기록한 사적비. 정지(鄭地)[1347~1391]는 고려 말엽의 무장으로 수군에 대한 정책을 제안하여 수군을 쇄신하였다. 1377년(우왕 3년) 순천도병마사로서 왜구를 크게 물리쳤으며, 그 공으로 해도대원수·문하평리가 되었다. 시호는 경렬(景烈)이다. 경렬공정지장군사적비는 정지 장군의 충정을 기리기 위해 1980년...
-
광주광역시 남구 양과동에 있는 박재룡의 공적을 기리기 위해 세운 비. 박재룡(朴載龍)의 공적을 기리기 위해 세운 공적비이다. 박재룡은 본관이 함양(咸陽)이다. 지산마을 서쪽 산골짝에 논 수만 정보가 말라 있는 땅이었는데, 최홍진(崔鴻鎭)의 주선으로 양과제(良苽堤)를 쌓는 일에 함께 힘을 보탰다. 1967년 겨울 관청 지원금을 교섭하여 범위를 넓히고 두어 길의 땅을 파서 둑을 쌓았다...
-
광주광역시 남구 화장동 농막마을에 있는 김정수의 유허비. 김정수(金鼎洙)[1887~1936]의 유허에 세운 비이다. 최윤환(崔允煥)이 글을 지어 1973년에 세웠다. 김정수의 본관은 김해(金海), 자는 영현(永賢), 호는 계남(桂南)이다 고광선(高光善)의 문인으로 이름난 효자였고, 땅을 주어 농민들의 기근을 줄여주고 병자들을 구제하였다. 1932년 관호정(觀湖亭)을 지어 문인들과...
-
광주광역시 남구 양과동 만산마을에 있는 김정복, 김정열 형제의 효행을 기려 세운 정려비. 1922년 광산김씨(光山金氏) 김정복(金廷福)·김정열(金廷烈) 형제의 효행를 기리기 위해 문중에서 세웠다. 김정복과 김정열은 김계문(金啓文)의 아들로 전라남도 광산군 유등곡면 향등리[지금의 광주광역시 남구 원산동]에 살았다. 어머니 김해김씨(金海金氏)의 병세가 위독하자 큰아들 김정복과 둘째아들...
-
광주광역시 광산구 신촌동에 있는 효자 김창환의 유허비. 김창환(金昌煥)의 효행을 기리고자 세운 유허비(遺墟碑)이다. 김창환은 김해김씨(金海金氏)로 관직은 동몽교관(童蒙敎官)과 조봉대부(行朝奉大夫)를 역임하고 이조참판(吏曹叅判)에 증직(贈職)되었다. 기우만(奇宇萬)이 명(銘)을 짓고 오준선(吳駿善)이 찬(撰)하였다. 이중권(李重權)이 글을 짓고, 이재춘(李載春)이 글씨를 썼다....
-
광주광역시 광산구 명도동에 있는 나주오씨 3대의 효행을 기려 세운 비. 나주오씨(羅州吳氏) 오상림(吳相霖), 오상림의 아들 오덕환(吳德煥)과 오직환(吳直煥), 오상림의 손자 오영기(吳永基) 등 3대의 효행을 기록한 비이다. 명도동 지역은 원래 조선시대에 나주목 적량면에 속하였는데, 행정구역이 바뀌면서 광주광역시 광산구에 편입되었다....
-
광주광역시 남구 도금동 도촌마을에 있는 윤의순의 효행비. 윤의순(尹義順)은 조선 전기 형조판서, 좌참찬 등을 역임한 문신 윤효손(尹孝孫) 의 후손이며, 아버지는 윤병철(尹秉哲)이다. 타고난 자품이 순박 온후하고 자상하였다. 전라남도 광산군 대촌면 도촌리[지금의 광주광역시 남구 도금동]에 있는 삭녕최씨(朔寧崔氏) 최성한(崔成漢)에게 출가하였다. 윤의순은 시댁에서 남다른 부덕(婦德)을...
-
광주광역시 광산구 동호동에 있는 류희달의 신도비. 류희달(柳希達)[1571~1631]은 임진왜란 때 공을 세워 선무원종공신(宣武原從功臣)에 책록(策錄)되었고 덕림사(德林祠)에 배향되었다. 신도비(神道碑)가 있는 광주광역시 광산구 동호동은 조선시대 때 나주목 장본면 지역이었고, 1906년 함평군으로 편입되었다. 1914년 나주군으로 다시 편입되어 본량면 동호리라 하였다. 1949년...
-
광주광역시 광산구 덕림동에 있는 류재만의 행적비와 모선기실비. 문화류씨(文化柳氏) 류재만(柳在萬)[1909~?]의 지극한 효성과 위선(爲先)의 정성을 기리기 위해 세운 행적비(行蹟碑)와 모선기실비(慕先紀實碑)이다. 류재만은 양일묵(梁鎰默), 오필선(吳弼善)의 문하이고 선조(先祖) 현창(顯彰)에 헌신하였다. 1964년 모친상, 1968년 부친상을 당하여 예를 다하였다. 현재 덕림동...
-
광주광역시 서구 서창동 절골마을에 있는 조선 전기 눌재 박상의 신도비. 눌재(訥齋) 박상(朴祥)[1474~1530]은 1501년(연산군 7)에 문과에 입격하였고, 중종 폐비 신씨(愼氏)의 복위를 상소하다가 관직에서 물러났으나, 학행이 뛰어나 이조판서로 추증되었다. 문간박선생눌재신도비명은1859년(철종 10)에 조선 전기 문신인 박상의 묘소 입구에 세운 신도비이다....
-
광주광역시 서구 금호동 병천사에 있는 지응현 시혜비 등 13기의 비석. 병천사비군(秉天祠碑群)은 병천사 입구에 세워져 있는 13기의 비석이다. 1918년부터 1920년 사이 전라남도 광주 관내와 담양, 장성, 곡성 등지에 건립되었던 지응현(池應鉉)의 시혜비와 제하상모자비(祭鰕商母子碑)가 있다. 지응현의 자는 형숙(亨淑), 호는 붕남(鵬南)이다. 기우만(奇宇萬)이 거병하여 항일 무장...
-
광주광역시 광산구 생용동 생용마을에 있는 복룡사 유허비. 복룡사(伏龍祠)는 범세동(范世東), 범가용(范可容), 범천배(范天培), 범기생(范起生), 범기봉(范起鳳)을 배향한 곳이다. 범세동의 자는 여명(汝明), 호는 복애(伏崖), 본관은 금성(錦城)이다. 1369년(고려 공민왕 18) 과거에 합격하여 간의대부(諫議大夫) 등을 지냈다. 조선이 건국되자 절의를 지키고 두문동에 은거하였다...
-
광주광역시 서구 용두동에 있는 봉산사의 묘정비. 봉산사묘정비는 봉산사의 묘정(廟庭)에 세운 비이다. 봉산사는 현와 고광선(高光善)[1855~1934]을 모시는 사우(寺宇)이며, 봉산사묘정비에는 봉산사의 건립 취지와 고광선의 공적, 추숭(追崇) 내용이 새겨져 있다....
-
광주광역시 북구 태령동에 있는 삼상위친계의 기적비. 삼상위친계(三相爲親契)는 광주성(光州城) 북쪽 서산(西山)의 서쪽 니상산(尼上山) 아래 사는 주민들이 상부상조를 위하여 결성한 계이다. 주민들이 곗돈을 모아서 전토를 사들이고 운영하면서 매년 봄 3월에 강신(講信)[여러 사람이 모여 약법(約法)이나 계를 맺는 것]을 하고, 난정수계(蘭亭修稧) 고사(故事)를 본 떠 시회(詩會)를 개...
-
광주광역시 남구 방림동 서강사에 있는 묘정비. 서강사(瑞岡祠)는 고려시대 삼한공신(三韓功臣) 윤신달(尹莘達)을 주벽(主壁)으로 하고, 여진을 정벌하고 동북 9성(東北九城)을 개척한 영평현개국백(鈴平縣開國伯) 윤관(尹瓘), 호부상서(戶部尙書) 윤언이(尹彦頤), 남원백(南原伯) 윤위(尹威), 함안백(咸安伯) 윤돈(尹暾), 영평부원군(鈴平府院君) 윤보(尹珤) 등 6위를 배향하는 사우(祠...
-
광주광역시 동구 운림동에 있는 정봉서· 정덕방 부자와 추성전씨의 정려비. 서산정씨(瑞山鄭氏) 정봉서(鄭鳳瑞)와 정봉서의 아내 추성전씨(秋城田氏), 정봉서의 셋째아들 정덕방(鄭德邦)의 효행과 열행을 기려 세운 정려비(旌閭碑) 이다. 정봉서의 자는 현거(賢舉), 호는 만오(晚悟)이다. 정봉서는 여섯 살 때 모친상을 당해 예를 갖추었고, 부친상 때 삼년 시묘살이를 하였다. 추성전씨는 남...
-
광주광역시 서구 서창동에 있는 3기의 비석. 서창동 비석군(西倉洞碑石群)은 농선대시주비(農船大施主碑) 1기와 시혜비(施惠碑) 2기로 이루어져 있다....
-
광주광역시 남구 노대동 신기마을에 있는 김상기의 성묘를 보위한 공을 기려 세운 비. 김상기(金相基)는 본관이 김해(金海)이고, 호는 석서(石西)이다. 김용후(金容厚)의 아들로 전라남도 광주군 효우동면 노대[지금의 광주광역시 남구 노대동]에서 세거한 집안이다. 기우만(奇宇萬), 고광선(高光善) 문하에서 수업하였다. 김상기(金相基)가 향교 장의(掌議)로 있으면서 대성전(大成殿) 성묘의...
-
광주광역시 남구 양과동에 있는 최홍진의 공을 기려 세운 공적비. 최홍진(崔鴻鎭)이 1941년 연간에 건천(乾川) 상류에 양과제(良苽堤) 저수지를 축조한 공적을 기려 세운 공적비이다. 1941년에 가뭄이 심했는데 최홍진이 앞장서서 민생을 좀먹는 사람들을 배격하고, 마을 부로의 명을 이어 당국과 교섭하여 몇 달 안에 저수지를 축조하였다....
-
광주광역시 남구 효덕동 노대마을에 있는 김경두와 밀양박씨의 효열비. 김경두(金炅斗)[1812~?]와 김경두의 아내 밀양박씨(密陽朴氏)[1811~1840]의 효열 행적비이다. 김경두의 본관은 김해(金海)이며, 자는 중집(中集)이다. 호적상 아버지는 김창섭(金昌燮), 생부는 통정대부 김창익(金昌益)이다. 효심으로 양부모를 봉양하였고, 병환이 들자 손가락 피를 흘려 환을 지어 먹게 할...
-
광주광역시 북구 삼각동에 있는 조선 후기의 정려각. 수원백씨충효정려각(水原白氏忠孝旌閭閣)은 충신 백홍암(白弘嵒)과 효자 백찬수(白讚洙)[1822~1858]의 충효 정신을 기려 세웠다. 백홍암은 병자호란 때 이흥발(李興勃)과 같이 의병을 일으켜 청주까지 나아갔다. 돌아와서는 부모님을 섬기며 후진 양성에 힘썼다. 친상을 당하여 시묘를 3년 동안 했는데 범이 늘 호위하였다 하여 호계라는...
-
광주광역시 북구 금곡동에 있는 임병룡의 은혜를 기린 비. 승지(承旨) 임병룡(林炳龍)의 공덕을 잊지 않기 위해 세운 비이다. 임병룡은 귀래정(歸來亭) 임붕(林鵬)의 후손으로 호는 가헌(可軒)이고 본관은 나주(羅州)이다. 음사(蔭仕)로 비서승(秘書丞)을 지냈고, 대환정(大歡亭)을 지어 유회소(儒會所)로 활용하였으며, 주민 구제활동을 하였다....
-
광주광역시 북구 금곡동에 있는 정락교의 구휼 정신을 기린 비. 양파(楊波) 정락교(鄭洛敎)[1863~1938]의 주민 구제활동을 기려 광산군 석곡면[지금의 광주광역시 북구 석곡동] 소작인들이 세운 비이다. 정락교는 온양정씨(溫陽鄭氏)로 참봉(參奉) 벼슬을 역임하였으며, 석서정(石犀亭)의 옛터에 양파정(楊波亭)을 건립하여 광주부[지금의 광주광역시]에 기증하였다....
-
광주광역시 남구 진월동에 있는 묘화광 서씨의 의연 행적을 기린 비. 묘화광(妙華光) 서씨(徐氏)의 의연(義捐) 행적을 기려 세웠다. 서씨는 법명이 묘화광이고, 침당의 액호가 우죽당(友竹堂)이다. 본관은 이천(利川)이고 서치조(徐致祚)의 딸이다. 소학교의 규모를 키우기 위해 삼천 원(圓)을 기부하였다....
-
광주광역시 동구 월남동에 있는 열녀 창녕조씨의 비. 창녕조씨(昌寧曺氏)의 열행(烈行)과 정절(貞節)을 기려 세웠다. 비석이 있는 광주광역시 동구 월남동은 조선시대 때 전라남도 광주군 지한면 주남리에 속한 지역이었다. 1914년 부동방면 월동리와 녹동리, 지한면 주남리를 합하여 지한면 월남리라 하였다. 1935년 효지면 월남리가 되었고, 1955년 전라남도 광주시 월남동이 되었다....
-
광주광역시 동구 월남동에 있는 천안전씨의 열행을 기린 비. 1974년 열부 천안전씨의 열행을 기리기 위해 세웠다....
-
광주광역시 광산구 덕림동에 있는 밀양박씨의 효열비. 유인(孺人) 밀양박씨(密陽朴氏)의 효행과 열행을 기리기 위해 세웠다....
-
광주광역시 서구 용두동에 있는 유인 행주기씨의 효열비. 행주기씨(幸州奇氏)의 효행과 열행을 기리기 위하여 세웠다. 행주기씨는 기권중(奇權仲)의 딸로, 장흥고씨(長興髙氏) 고경주(高庚柱)와 혼인하여 시부모에게 극진히 효도를 하였고 남편을 섬겼다. 고광은이 비문을 짓고 글씨를 썼다. 건립 추진위원장은 박하만, 부위원장은 기세은이었다....
-
광주광역시 남구 구동 광주공원에 있는 의병장 심남일의 순절비. 대한제국기 의병장 심남일(沈南一)[1871~1910]의 본명은 수택(守澤), 호는 덕홍(德弘), 본관은 청송(靑松), 전라남도 함평 출신이다. 1905년 을사조약이 체결되자 의병을 일으켜 장흥, 영암. 해남, 보성, 남평, 능주, 나주 등지에서 수많은 전과를 올렸다. 1909년 능주 풍치(風峙)[지금의 전라남도 화순군...
-
광주광역시 남구 임암동 임정마을에 있는 전부일 장군의 효행을 기려 세운 비. 전부일(全富一)[1924~2004]의 본관은 천안(天安), 자는 정길(丁吉), 호는 서봉(瑞峰)이다. 전방은(全邦殷)의 셋째아들로 임암마을 출신이다. 일제강점기에 징병으로 입대하여 중국 만주(滿洲)에서 복무 중 부친상 비보를 들었지만 올 수가 없어서 땅을 치고 하늘을 보며 곡을 하였다고 한다. 광복 뒤에는...
-
광주광역시 남구 노대동에 있는 박태용의 시혜불망비와 유적비. 박태용(朴台鏞)[1869~1941]의 본관은 밀양(密陽), 자는 성빈(聖彬)이다. 아버지는 박정보, 어머니는 이천서씨(利川徐氏)이다. 1893년(고종 30)에 덕행으로 온릉참봉(溫陵陵參)에 천거되었고, 1897년(고종 34)에 중추원(中樞院) 의관(議官)을 지냈다....
-
광주광역시 북구 오치동에 있었던 이용헌의 묘비. 이용헌(李龍憲)[1851~1895]의 묘비이다. 이용헌은 기정진(奇正鎭)의 제자로 학문으로 일가를 이루었다....
-
광주광역시 북구 생용동에 있는 최명구의 기념비. 죽헌최명구 기념비(竹軒崔命龜紀念碑)는 전라남도 광주군 우치면 죽헌농계원(竹軒農契員) 일동이 최명구의 공적을 기려 세웠다. 우치면은 1931년까지 지금의 광주광역시 북구 지야동[건국동 관할] 일원에 있었던 면 이름이다. 1931년 4월 1일 우치면과 본촌면을 합해 지산면이라 하였다. 1935년 광주군을 광산군으로 개칭하여 광산군 지산면...
-
광주광역시 남구 진월동에 있는 고성운의 은혜를 기린 비와 정순환의 선행을 기린 비. 전라남도 광주군 효천면[지금의 광주광역시 남구] 소작인들이 통정대부(通政大夫) 고성운(高聖運)[1857~1936]의 시은(施恩)에 보답하고자 세운 불망비와 효천면 주민 일동이 세운 효천면장 정순환(鄭淳煥)의 선행 행적비이다....
-
광주광역시 남구 원산동에 있는 이조원의 행적을 기록한 비. 광산이씨(光山李氏) 청심당(淸心堂) 이조원(李調元)[1433~1510]의 행적을 기록한 유허비이다. 이조원은 필문(蓽門) 이선제(李先齊)[1390~1453]의 둘째 아들이다. 아버지 이선제의 학통을 이어 문장과 도학이 당대의 종사(宗師)라고 추앙을 받았다. 전라남도 강진군에 있는 수암서원과 전라남도 화순군에 있는 오현당에...
-
광주광역시 광산구 신룡동에 있는 청주한씨 부인의 효열비. 청주한씨(淸州韓氏)는 29세 때 남편이 괴질에 걸리자 성심껏 간호를 하였고, 남편이 운명하려 하자 살을 베고 피를 주어 며칠을 연명하게 하였다. 남편이 운명하자 본인도 따르려 하였으나, 나이든 시부모를 모시기 위해 상례를 잘 치렀다. 시어머니가 병이 들자 극진히 간호하였고, 좌우 손가락을 베고[斷指] 피를 입으로 넣어 연명하...
-
광주광역시 남구 진월동 진제마을에 있는 조선 후기 청주한씨 효자 2명의 효행을 기려 세운 비. 청주한씨쌍효비는 조선 후기 효자 한필오(韓弼五), 한필룡(韓弼龍) 형제의 효행을 기리기 위해 세워진 2개의 비석이다. 한필오와 한필룡 형제는 본관이 청주(淸州)로 부모에 대한 효성이 극진하였다. 1760년 부친상을 당하자 두 형제는 시묘살이를 하였으며, 어머니가 노망(老妄)이 나자 두 형...
-
광주광역시 남구 노대동 신기마을에 있는 김순곤의 공적을 기려 세운 비. 김순곤(金順坤)[1918~1979]의 본관은 김해(金海), 자는 경순이다. 김용관(金容權)의 3남으로 전라남도 광주군 효천면 노대리[지금의 광주광역시 남구 노대동]에서 태어났다. 낙후된 고장의 발전을 위해 향토인이 함께 뭉쳐 일해야 한다고 강조하였다. 특히 남제지방(南堤池防)을 축조할 때 답 825평[약 272...
-
광주광역시 동구 선교동에 있는 조선 후기 탐진최씨 네 효자와 두 열녀의 정려각. 탐진최씨사효이열정려는 탐진최씨의 네 효자와 두 열녀의 효열정신을 기려 세웠다. 처음에는 효자 최언광(崔彦光), 최세효(崔世孝), 최웅걸(崔雄傑), 최두걸(崔斗傑)과 열녀 최세효(崔世孝) 처 함풍이씨(咸豊李氏)를 모셨으나, 1917년 최홍순(崔弘淳)의 처 평산신씨(平山申氏)를 추가로 모셨다....
-
광주광역시 광산구 지산동에 있는 평택임씨 삼강유허비. 평택임씨(平澤林氏) 임영수(林英秀)와 임영수의 아내, 임영수의 아들 임계(林桂)와 임계의 아내, 임영수의 손자 임광윤(林光胤), 임영수의 증손자 임은(林嶾)과 임두(林㞳) 등 4대에 걸친 충·효·열 삼강의 정신을 기리기 위해 세웠다. 기우만(奇宇萬)이 1915년에 비문을 지었고, 후손 임철주(林哲周)가 1941년에 비문 글씨를...
-
광주광역시 광산구 안청동에 있는 박노술의 광복을 염원하는 글을 새긴 석대. 풍천대(風泉臺)는 박노술(朴魯述)[1851~1917]의 항일 의적(義蹟)을 기념하는 삼층 석대(石臺)이다. 박노술은 조선 후기의 학자로 지금의 광주광역시 광산구 안청동에서 태어났다. 기정진(奇正鎭) 문하에서 학업을 닦았다. 항일의식 각성을 촉구하였고, 1917년 6월 광주경찰서에 끌려갔다가 사흘 만에 의식을...
-
광주광역시 남구 원산동 만산마을에 있는 조선시대 문신 이선제의 신도비. 이선제(李先齊)[1390~1453]의 본관은 광산(光山), 자는 가보(家父), 호는 필문(蓽門)이다. 1419년(세종 1) 식년문과(式年文科)에 급제하였고, 『태종실록(太宗實錄)』편찬과 『고려사(高麗史)』의 개찬에 참여하였던 집현전 학사로서 호조참판(戶曹參判), 예문관(藝文館) 제학(提學) 등을 지냈다. 145...
-
광주광역시 남구 사동에 있는 조선 후기 함풍이씨의 효열 정려각. 정호직(鄭浩直)의 처 함풍이씨(咸豊李氏)의 효열을 기리기 위하여 하동정씨 문중에서 세웠다. 함평이씨는 어버이를 섬기는 데 노력을 다하였고 남편을 잘 위하여 죽은 뒤 조정으로부터 정려를 세우라는 특명이 있었다. 1830년 10월에 정민영(鄭旻濚)이 기록한 '제효열질부이씨정려병서(題孝烈侄婦李氏旌閭幷序)'에 나온다....
-
광주광역시 북구 화암동에 있는 송제민의 비. 송제민(宋濟民)의 공적을 기려 세운 비석이다. 송제민의 자는 이인(以仁), 본관은 홍주(洪州)이다. 송정황(宋庭篁)의 아들이며 정개청(鄭介淸), 이지함(李之菡)의 문하에서 공부하였다. 1592년(선조 25) 임진왜란 때 양산룡(梁山龍)·양산숙(梁山璹) 등과 함께 의병을 일으켜 김천일(金千鎰) 의병장 막하에서 활동하였고, 김덕령(金德齡)의...
-
광주광역시 남구 진월동에 있는 정석남의 실적비. 정석남(石南實)의 효행 행적을 기리려 세웠다. 정석남은 동래정씨(東萊鄭氏) 정운선(鄭云先)의 딸이며, 어머니는 추계추씨(楸溪秋氏)이다. 일찍 부모를 여의었고 정석남의 아들인 정재장(鄭載長)도 일찍 죽었다. 한결같은 효심으로 시부모를 섬기는 데 마치 남편을 섬긴 것같이 하였다. 시부모가 세상을 떠나자 10리[약 4㎞] 밖 옥녀봉 동쪽...
-
광주광역시 남구 노대동에 있는 고성이씨의 기행비. 고성이씨(固城李氏)의 효행을 기려 세운 기행비(紀行碑)이다. 김해김씨(金海金氏) 김호송(金鎬松)에게 시집을 와서 시어머니 해주최씨(海州崔氏)와 시할머니 밀양박씨(密陽朴氏)를 20여년 간 봉양하고, 시어머니 간병을 4년 동안 하는 등 효행을 실천한 사실을 국한문 혼용체로 기록하였다. 위계도가 비문을 짓고 비문 글씨는 강인환이 썼다....
-
광주광역시 남구 이장동 복수마을에 있는 문화유씨 행적비. 문화유씨(文化柳氏)는 고재열(高在烈)에게 16살에 시집을 왔는데 반 년도 못 되어 사별하였다. 이후 문화유씨는 시부모를 극진히 봉양하였으며, 시부모가 세상을 뜨자 생존하였을 때와 똑같이 섬기며 예를 갖추고 조카를 승중손(承重孫)으로 세웠다. 문화유씨의 효열 실천을 기리기 위해 김준식(金駿植)이 비문을 짓고 글씨는 김정회(金正...
-
광주광역시 광산구 본덕동에 있는 진주강씨의 효행을 기려 세운 비. 진주강씨(晋州姜氏)는 강이회(姜以會)의 딸로 부모를 지극한 효성으로 섬겼다. 반두명(潘斗明)에게 출가하여 시부모를 잘 봉양하였고, 반두명이 세상을 먼저 떠나자 예를 갖춰 장례를 치렀다. 낮에는 땔감을 하고 밤에는 길쌈을 하여 어려운 시가를 일으키고 시부모를 공경하였다....
-
광주광역시 남구 양림동에 있는 조선 후기 효자 정엄의 정려비와 정려각. 문신 정엄(鄭淹)[1528~1580]의 효자 정려비와 정려각이다. 정엄은 본관이 광주(光州)로 정만종의 아들이다. 1558년(명종 13)에 문과에 급제하였다. 1574년(선조 7)에 어머니 봉양을 위하여 나주목사가 되어 선정을 베풀면서 어머니의 병을 정성껏 돌보았으나 돌아가시자 슬픔을 이기지 못하고 장례를 치른...
-
광주광역시 광산구 대산동에 있는 효자 김기삼을 기려 세운 비. 김기삼(金基三)의 효행을 기리고자 세운 기적비(紀蹟碑)이다. 비각 안에 있으며 비각 상량문의 글은 오동수(吳東洙)가 지었다. 김기삼은 어른들의 상을 당하여 시묘살이를 하였는데, 이때 동물들이 호위를 해 주었고 시묘 지역에는 풀이 나지 않았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