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60005366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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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瑞石遊覽記 |
분야 | 구비 전승·언어·문학/문학 |
유형 | 작품/문학 작품 |
지역 | 광주광역시 북구 금곡동 |
시대 | 근대/근대 |
집필자 | 고성혜 |
저자 생년 시기/일시 | 1857년 - 김운덕 출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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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 몰년 시기/일시 | 1936년 - 김운덕 사망 |
편찬|간행 시기/일시 | 1957년 - 「서석유람기」 『추산유고』 권3에 수록 |
배경 지역 | 무등산 - 광주광역시 북구 금곡동 |
성격 | 유산기 |
작가 | 김운덕 |
[정의]
김운덕이 전라도 광주 지역에 있는 무등산을 유람하고 지은 글.
[개설]
「서석유람기」를 지은 김운덕(金雲悳)[1857~1936]의 자는 명극(明克), 호는 추산(秋山), 본관은 경주(慶州)이다. 연재(淵齋) 송병선(宋秉璿)과 심석(心石) 송병순(宋秉珣)에게 수학하였고, 송사(松沙) 기우만(奇宇萬), 난와(難窩) 오계수(吳繼洙) 등과 교유하였다. 김운덕은 1907년 일본에 대항하여 의병을 일으키려다가 옥고를 치렀다. 김운덕은 옥고를 치르는 중에 「정송릉상취(貞松凌霜翠)」, 「정금입화강(精金入火剛)」 등의 시를 지었다. 그 외 여러 유람록과 산수시를 남겼다. 저서로 『추산유고(秋山遺稿)』 4권 2책이 있으며, 「서석유람기」는 『추산유고』 권3에 실려 있다.
[구성]
「서석유람기」는 유산의 동기, 주상절리의 형상에 대한 내용으로 구성되어 있다.
[내용]
1. 유산의 동기
김운덕은 1908년에 무등산에 오르기로 마음 먹고 1909년에 무등산을 유람한다. 여기에는 단순히 무등산만 둘러보는 것이 아니라 기삼연·김율의 묘와 조상의 묘를 함께 둘러보겠다는 뚜렷한 목적이 들어있었다.
2. 주상절리의 형상
김운덕은 암자에서 하룻밤을 묵고 다음 날 본격적으로 무등산을 유람한다. 다음은 무등산의 모습을 청룡·백호·현무·주작 등으로 비유한 내용이다.
[본문 번역]
다음 날 둘러보니, 청룡석이 천 개의 화표처럼 늘어서 하늘로 곧바로 용솟음쳐서 반룡이 하늘로 오르는 것 같았다. 백호석이 서있는 것은 마치 장대가 만 길이나 되어 멀리 풍뢰를 삼키는 것이 호랑이가 웅크리고 앉아 바다를 바라보고 있는 것 같았다. 현무석은 천 점 별자리가 나열되어 서로 하늘에 연춤을 추며 북두와 상응하고 푸른 산봉우리에 상서로움을 바치는 듯하였다. 이 때문에 규봉이 분명하며 참으로 규봉암은 하늘이 지은 것이다. 암자를 떠나 동쪽 석문을 나서 광석대에 이르렀다. 한 조각 대(臺)의 기세는 세 칸 대청과도 같았다. [翌日周覽 則靑龍之石 列如華表千株 而直聳雲漢者 盤龍上天也 白虎之石 立如將臺萬仭 而遠吞風籟者 蹲虎望海也 玄武之石 羅如星宿千點 而相連玉宇者 明奎聮貫也 朱雀之石 舞如鳳翔千仭 而相應北斗者 蒼峰獻瑞也 是故奎峰分明 寔天作之奎峰庵也 離庵出東石門 而至廣石臺 臺勢一片 如三間大㕔也]
[특징]
「서석유람기」의 제목에 등장하는 '서석'은 무등산을 이르는 별칭이다. 「서석유람기」는 다른 무등산 유산기에 비하여 유람 행적이 다채롭지는 않으나, 돌의 모양을 동물의 모습으로 나타내고 동자 석불의 여러 가지 모습과 자세를 적는 등 묘사가 상세하고 독특하여 특징적이다.
[의의와 평가]
김운덕의 「서석유람기」는 시기적으로 20세기 첫 무등산 유산기이다. 김운덕이 유람하였던 때는 국권을 빼앗긴 어지러운 시기였으며, 항일 의병 활동을 하려다가 옥고를 치른 후였다. 때문에 다른 유산기에서는 찾아보기 어려운 조상에 대한 숭배와 의병 활동을 하다가 순절한 이들에 대한 애도가 그려지고 있다는 점이 독특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