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60004684 |
---|---|
한자 | 金忠壯公遺事 |
분야 | 구비 전승·언어·문학/문학,문화유산/기록 유산 |
유형 | 문헌/전적 |
지역 | 광주광역시 |
시대 | 조선/조선 후기 |
집필자 | 박세인 |
[정의]
전라도 광주 지역 출신으로 임진왜란 때 의병 활동을 한 김덕령의 시문집.
[개설]
『김충장공유사(金忠壯公遺事)』는 임진왜란 때 의병장으로 크게 활약한 김덕령(金德齡)[1568~1596]의 시문과 각종 관련 자료를 엮은 시문집이다. 문집에는 김덕령이 남긴 문학 작품 외에 형 김덕홍(金德弘)과 아우 김덕보(金德普)의 유적과 시문도 함께 실려 있다. 또한, 후대인들이 김덕령에 관해 쓴 다양한 유형의 글도 수록되어 있다.
[저자]
김덕령의 자는 경수(景樹), 시호는 충장(忠壯), 본관은 광산(光山)이다. 1568년(선조 1)에 아버지 김붕섭(金鵬燮)과 어머니 남평반씨(南平潘氏) 사이에서 둘째 아들로 태어났다. 김덕령은 1592년(선조 25)에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의병을 이끌고 여러 전투에서 승리하며 빼어난 활약을 하였다. 선조는 충용장(忠勇將)·초승장군(超乘將軍) 등의 군호를 내려 김덕령의 무용을 치하하였다. 1596년(선조 29) 7월 충청도 홍산에서 일어난 이몽학(李夢鶴)의 반란에 연루되었다는 모함으로 혹독한 추국을 받다가 29세의 나이로 옥사하였다. 1661년(현종 2)에 신원되어 관작이 복구된 이후 여러 차례 추증(追贈)[나라에 공로가 있는 벼슬아치가 죽은 뒤에 품계를 높여주던 일]되었으며, 1788년(정조 12)에 시호가 내려졌다. 김덕령의 생애담과 용맹은 다양한 설화와 『김덕령전』 등으로 전승되고 있다.
[편찬/간행 경위]
1694년(숙종 20)에 왕명으로 처음 편찬되었다. 이후 1796년(정조 20) 정조의 명에 따라 다시 간행되었는데, 초간본에 정조의 어제서문·어제사제문(御製賜祭文)·윤음(綸音) 등을 추가하였다. 정조 때 간행된 문집에 속편을 더해 1843년(헌종 9)에 추간한 판본도 전하고 있다.
[형태/서지]
『김충장공유사』 저본은 한국학중앙연구원 장서각 소장본이다. 3권 1책의 목판본으로, 제책 형태는 오침선장본(五針線裝本)이다. 판식은 사주쌍변(四周雙邊)으로 반곽(半郭) 14×20.6㎝이고, 문집 전체 크기는 20.9×34.7㎝이다. 표제·판심제(版心題)·권수제(卷首題)는 모두 '김충장공유사'이며, 표지 배면에 '적상산성(赤裳山城)'이 기록되어 있다.
[구성/내용]
본문 3권에 부록 상·하를 포함하여 1책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목판본이다. 표지에 이어 권수에 「어제김충장유사서(御製金忠壯遺事序)」가 실려 있는데, 이 서문은 1796년에 정조가 짓고 정조의 명에 따라 광주목사 서형수(徐瀅修)가 글씨를 썼다. 권수(卷首)에는 1788년 정조가 김덕령에게 시호를 내릴 때 쓴 「어제사제문」·「윤음」이 수록되어 있다. 권1은 김덕령의 유고 시문을 모은 것으로, 한시 5편, 가(歌) 1편, 서(書) 4편, 격문 2편, 제문 1편이 실려 있다. 권2는 김덕령의 연보를 기술한 것이다. 권3은 후인들이 김덕령에 관해 쓴 글을 모아 엮은 것인데, 기실(記實)·전(傳)·전후서(傳後敘)·시장(諡狀)·비(碑) 등으로 이루어져 있다. 그리고 부록의 상은 김덕홍·김덕보의 행록(行錄)과 시문, 관련 자료 등을 담고 있다. 부록 하는 김덕령과 김덕보의 수적(手蹟)을 수록하고 있다. 이 중 권1에 수록된 가 1편은 시조 「춘산곡(春山曲)」으로, 김덕령이 1596년 국문을 당할 때 옥중에서 자신의 억울한 심정을 토로한 노래로 보인다. 권3의 전은 이민서(李敏敍)가 김덕령의 일대기를 지은 것으로, 김덕령의 충절을 기리고 있다.
[의의와 평가]
임진왜란 때 향촌 의병들의 창의 과정과 호남·영남의 의병 항쟁 연구에 중요한 문집이다. 또한, 김덕령의 옥사와 정치적 복원 과정과 관련한 자료는 전란기와 이후의 정치적 지형 연구에도 활용할 수 있다. 아울러 김덕령과 관련된 설화의 형성 배경을 탐구하는 데도 의미 있는 단서를 제공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