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60005939 |
---|---|
한자 | 全南大學校龍鳳館 |
분야 | 역사/근현대 |
유형 | 유적/건물 |
지역 | 광주광역시 북구 용봉로 77[용봉동 산64-1] |
시대 | 현대/현대 |
집필자 | 이수경 |
건립 시기/일시 | 1957년 - 전남대학교 용봉관 건축 |
---|---|
문화재 지정 일시 | 2020년 - 전남대학교 용봉관 국가등록문화재 등록 |
현 소재지 | 전남대학교 - 광주광역시 북구 용봉로 77[용봉동 산64-1] |
성격 | 문화재 |
양식 | 벽체: 조적조|슬래브: 철근콘크리트조 |
소유자 | 전남대학교 |
관리자 | 전남대학교 |
[정의]
광주광역시 북구 용봉동에 있는 1957년에 건축된 전남대학교 구 본관 건물.
[개설]
전남대학교 용봉동 캠퍼스의 본관으로 사용되었던 건물로 1957년 건축되어 현재까지 원형이 잘 유지되어 있다. 학교 캠퍼스의 진입로 정면에 위치하여 상징성이 매우 높은 건물이다. 용봉관은 캠퍼스 형성 초기의 역사를 잘 보여주고 있을 뿐 아니라 신축 당시의 모습을 유지하면서 역사관으로 사용되고 있어 근대건축의 보존과 활용의 원칙에 적절하게 부합하는 모범적인 사례이다. 후면의 일부 증측으로 인해 일부 변형이 있으나 잘 보존되어 있다.
[위치]
광주광역시 북구 용봉동 전남대학교 캠퍼스 정문에서 직선 거리에 용봉관이 있다. 용봉관은 입지와 진입경관이 캠퍼스의 상징적 성격을 갖고 있다.
[변천]
전남대학교는 과거 도립광주농과대학[1909], 도립광주의과대학[1944], 도립목포상과대학[1920], 사립대성대학[1947] 등 4개의 단과대학을 개편·통합하고 추가적으로 공과대학을 인가받아 1952년 6월 종합대학으로 개교하였다. 이 당시 대학본부는 의과대학[광주광역시 동구 학동 소재] 내에 위치하였으나, 1954년 오늘날 광주광역시 북구 용봉동 일대의 부지를 매입하여 캠퍼스를 조성하는 과정에서 1957년에 대학본부 건물을 새롭게 신축함에 따라 이전(移轉)해 왔다. 전남대학교 용봉관은 1957년에 지어진 대표적인 지방 국립대학교 본관 건축물로 사용되다가, 1996년에 대학본부를 다른 곳으로 옮겨 짓게 됨에 따라 사회교육원으로 사용되었다. 2012년 리모델링 공사를 거쳐 현재는 5·18 기념관, 대학역사관, 호남학연구원 등 전시 및 연구시설로 활용하고 있다.
[형태]
3층 규모의 조적조 건물로서 1~3단의 화강석 기단 위에 세워졌으며, 옥상 중앙부에는 수직으로 높게 세운 탑상형의 공간을 중심으로 좌우 대칭의 평면을 구성하고 있다. 조적조 내력벽체와 철근 콘크리트슬래브가 혼용된 구조로 지어진 건축이다. 평면 구성은 대학본부의 성격에 맞게 업무 및 사무 공간 등으로 구획하였는데, 준공 당시 대학신문에 실린 기사 내용에 따르면, 1층은 중앙 홀, 교무과, 학생과, 학적과, 총무과, 경리과, 각과장실, 응접실, 학감실, 학생감실, 수위실 등이 있었으며, 2층은 총장실 및 부속실, 교학국장실, 사무국장실, 학장실을 두었고 3층에는 대학원장실 및 서무과, 서고, 회의실, 물품고, 영선계실이 위치하였다. 또한, 옥상에 설치한 탑상형의 공간 내부에는 별도의 양수실(揚水室)을 마련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과거 사진자료에 따르면, 최초 대학본관으로 건립된 이후 오늘날에 이르기까지 증·개축 및 다양한 기능으로 사용되는 과정에서 내·외부의 공간 변형은 다소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현황]
현재는 5·18 기념관, 대학역사관, 연구원 등 전시 및 연구시설로 활용하고 있다. 2층에 일부 실 천정에는 원형과 별표 모습의 디자인이 남아있다.
[의의와 평가]
현재까지 전체 등록문화재 중 학교 관련 건축물은 약 70건 정도이다. 다수의 건축물이 일제 강점기 건축물로 1950년대 이후 건축물은 상대적으로 소수이다.
지금까지 등록문화재 또는 지정문화재로 보존되고 있는 건물이 일제강점기에 지어진 건물로 석재로 건축된 것이 주류였으나, 전남대학교 용봉관은 광복 후에 지역 건축가에 의해 설계된 대학교 본관 건축으로 근대건축사적 가치가 크다. 대학본부 건물에 사용된 붉은 벽돌은 당시 재료비 절감을 위해 1954년 교내에 설치하였던 연와공장에서 직접 생산한 것으로 알려져 있어 시대적 상황을 잘 보여주고 있으므로 문화재 가치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