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6000488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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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遊瑞石山韻 |
분야 | 구비 전승·언어·문학/문학 |
유형 | 작품/문학 작품 |
지역 | 광주광역시 북구 금곡동 |
시대 | 조선/조선 전기 |
집필자 | 황민선 |
저자 생년 시기/일시 | 1474년 - 박상 출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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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 몰년 시기/일시 | 1530년 - 박상 사망 |
배경 지역 | 무등산 - 광주광역시 북구 금곡동 |
성격 | 한시 |
작가 | 박상 |
[정의]
조선 전기 문신 박상이 무등산을 유람한 기억을 시로 써서 정만종에게 준 한시.
[개설]
「유서석산운(遊瑞石山韻)」을 지은 박상(朴祥)[1474~1530]의 본관은 충주(忠州), 자는 창세(昌世), 호는 눌재(訥齋)이며, 1501년 식년문과에 급제하여 시강원사서, 병조좌랑, 전라도사 등을 지냈다. 1506년 사간원헌납(司諫院獻納)이 되었을 때 종친들의 중용을 반대하다 하옥되었다가 재신들의 상소로 풀려나왔으나, 한산군수로 좌천되었다. 이후 종묘서영(宗廟署令)·소격서영(昭格署令)으로 옮겼으나, 부모 봉양을 핑계로 임피현령(臨陂縣令)을 지낸 후 고향인 광산으로 돌아가 은거하였다. 다시 1511년 수찬, 응교를 거쳐 담양부사를 지냈다. 1515년 중종반정[1506년]으로 폐위된 단경왕후 신씨의 복위를 주장하고, 박원종(朴元宗) 등 3인의 훈신(勳臣)[공신]이 국모를 내쫓은 죄를 바로잡기를 청하다가 노여움을 사서 남평으로 유배되었다. 1516년 방면되어 순천부사, 선공감정, 상주목사, 충주목사 등을 지냈다. 1527년 나주목사를 지내던 중 1529년 병으로 사직하고 귀향하였다. 저서로는 『눌재집(訥齋集)』이 있다.
「유서석산운」은 박상이 정만종(鄭萬鍾)에게 1515년 영평[현 전라남도 나주군 남평읍 지역에 있었던 남평현의 옛 이름]에서 유배 생활을 하던 시절 무등산을 함께 유람하였던 기억을 시로 써서 정만종에게 보여준 칠언율시로, 박상의 문집 『눌재집』 속집 3권에 수록되어 있다. 정만종은 조선 전기에 예조참판, 경상도관찰사, 동지춘추관사(同知春秋館事) 등을 지낸 문신이다.
[구성]
「유서석산운」은 1구에 7자씩 모두 8구로 이루어진 칠언율시이다.
[내용]
유서석산운(遊瑞石山韻)[서석산을 유람하며]
석년증적영평관(昔年曾謫永平官)[옛날 영평으로 귀양 갔을 때]/ 무등산운차등반(無等山雲借登攀)[무등산 구름 헤치고 올랐었네]/ 염불암중성해후(念佛庵中成邂逅)[염불암에서 서로 해후하고]/ 천왕봉상여반환(天王峯上與盤桓)[천왕봉 위에서 함께 거닐었지]/ 남주오십탄환소(南州五十彈丸小)[남쪽의 오십 고을 탄환처럼 작았고]/ 북궐삼천지척간(北闕三千咫尺間)[북쪽 궁궐 삼천리는 지척이라]/ 쇠병일가심폐호(衰病日加深閉戶)[날로 병들어 깊이 문 닫고 있으니]/ 재유내득도층만(再遊那得到層巒)[언제나 다시 층층 산을 오르려나]
[의의와 평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