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6000488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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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遊瑞石山-魏伯珪 |
분야 | 구비 전승·언어·문학/문학 |
유형 | 작품/문학 작품 |
지역 | 광주광역시 북구 금곡동 |
시대 | 조선/조선 후기 |
집필자 | 황민선 |
저자 생년 시기/일시 | 1727년 - 위백규 출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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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 몰년 시기/일시 | 1798년 - 위백규 사망 |
배경 지역 | 무등산 - 광주광역시 북구 금곡동 |
성격 | 한시 |
작가 | 위백규| |
[정의]
조선 후기 실학자인 위백규가 무등산을 유람하고 쓴 한시.
[개설]
「유서석산(遊瑞石山)」을 지은 위백규(魏伯珪)[1727~1798]의 본관은 장흥(長興), 자는 자화(子華), 호는 존재(存齋)·계항(桂巷)이다. 장흥 관산에 있는 장천재(長川齋)에 기거하면서 공부에 전념하였고, 1750년 학행으로 향천(鄕薦)[지방 수령 등이 그 고을의 유능하고 평판 좋은 유생 등을 중앙에 천거하는 일]을 받았다. 1751년에 윤봉구(尹鳳九)를 스승으로 만나 1766년까지 윤봉구의 문하에서 공부하면서 경서, 의례, 이기심성론(理氣心性論)에 관한 논의를 나누었다. 과거에 응시하였으나 계속 낙방하였으나, 68세인 1794년 서영보(徐榮輔)의 천거로 선공감부봉사, 기장현감, 태인현감, 옥과현감, 장원서별제, 경지전령 등을 지냈다. 경전의 해석, 이기심성론은 전통 성리학에서 크게 벗어나진 않으나, 현실 중심적인 시각으로 18세기 조선의 세태를 적나라하게 비판하는 실학자적 면모를 갖추었다. 위백규는 특히 향촌 사회를 개선해야 한다는 주장에서 실학자로서의 색채가 짙다. 저서로는 『존재집(存齋集)』. 『정현신보(政鉉新譜)』, 『사서차의(四書箚義)』, 『환영지(寰瀛誌)』, 『본초강목(本草綱目)』, 『고금(古琴)』·『격물설(格物說)』, 『원류(原類)』, 『연어(然語)』 등이 있다.
[구성]
「유서석산」은 1구에 7자씩 모두 8구로 이루어진 칠언율시로, 위백규의 문집인 『존재집』 1권에 수록되어 있다. 서석산은 무등산의 별칭이다.
[내용]
유서석산(遊瑞石山)[서석산을 유람하며]
공출진애익신풍(羾出塵埃翼迅風)[빠른 바람 날개 삼아 티끌세상에서 날아올라]/ 형림궁악사망동(逈臨穹岳四望同)[아득히 높은 산 오르니 사방이 똑같구나]/ 산천착락삼한국(山川錯落三韓國)[산천은 삼한 땅 여기저기에 흩어져 있고]/ 천지건개대해동(天地褰開大海東)[천지는 위대한 해동에 활짝 열렸네]/ 만학령관개조화(萬壑靈觀皆造化)[수만 골짜기 신령한 경치 모두 조화요]/ 천년정기기영웅(千年正氣幾英雄)[천년의 정기에 영웅은 몇이던가]/ 쌍모령약인간세(雙眸領略人間世)[두 눈으로 인간 세상 두루 이해하니]/ 소득경륜다소공(消得經綸多少功)[경륜에 얼마간의 공을 얻으리]
[의의와 평가]
「유서석산」은 위백규 시 세계의 일면을 엿볼 수 있는 작품으로, 18세기 문인들의 무등산 유람 양상을 확인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