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6000486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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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等瑞石山-丁若鏞 |
분야 | 구비 전승·언어·문학/문학 |
유형 | 작품/문학 작품 |
지역 | 광주광역시 북구 금곡동 |
시대 | 조선/조선 후기 |
집필자 | 황민선 |
저자 생년 시기/일시 | 1762년 - 정약용 출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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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 몰년 시기/일시 | 1836년 - 정약용 사망 |
저술|창작|발표 시기/일시 | 1778년 - 정약용 「등서석산」 지음 |
배경 지역 | 무등산 - 광주광역시 북구 금곡동 |
성격 | 한시 |
작가 | 정약용 |
[정의]
1778년에 조선후기 실학자 정약용이 형제들과 함께 전라도 광주 지역 무등산을 유람하면서 쓴 오언배율의 한시.
[개설]
「등서석산(登瑞石山)」을 지은 정약용(丁若鏞)[1762~1836]의 자는 미용(美鏞), 호는 다산(茶山)·사암(俟菴)·여유당(與猶堂)·채산(菜山), 본관은 나주(羅州)이다. 서울 근교의 남인 가문 출신으로, 정조(正祖) 때 문신으로 벼슬살이를 하였으나 청년기에 접했던 서학(西學)으로 인해 1801년 신유박해 때 유배를 시작하여 18년간의 긴 유배 생활을 하게 되었다. 이 기간에 정약용은 약 500여권의 방대한 저술을 남겼으며, 조선 후기 중농학파 실학을 집대성한 인물로 평가된다. 정약용의 저서로는 『경세유표(經世遺表)』, 『목민심서(牧民心書)』, 『흠흠신서(欽欽新書)』, 『여유당전서(與猶堂全書)』 등이 있다. 「등서석산(登瑞石山)」은 정약용이 부친의 임지인 화순에서 형과 과거 공부를 하던 때에 화순 사람 조익현(曺翊鉉)의 권유로 형제와 함께 무등산을 유람하면서 쓴 한시이다.
[구성]
「등서석산」은 그의 문집인 『여유당전서(與猶堂全書)』 제1집 1권에 수록되어있는 오언배율의 한시이다.
[내용]
등서석산(登瑞石山)[서석산에 올라]
서석중소앙(瑞石衆所仰)[서석산 뭇 사람들 우러러보는데]/ 수의유고설(厜㕒有古雪)[산꼭대기에는 해묵은 눈 남아 있네]
불개혼돈형(不改渾沌形)[태곳적 모습 그대로]/ 진적치준절(眞積致峻巀)[쌓고 쌓여서 우뚝하구나]
제산빙섬교(諸山騁纖巧)[여러 산들 섬세하고 정교하게 펼쳤는데]/ 각삭노골적(刻削露骨節)[새기고 깎은 듯 뼈마디 드러내는구나]
장등막무계(將登邈無階)[오르려 할 때는 까마득하더니]/ 급원지비열(及遠知卑列)[멀리 올라오니 뭇 산들 낮게 깔렸네]
벽행작이현(僻行皭易顯)[모난 행실은 쉽게 훤히 드러나지만]/ 지덕암난별(至德闇難別)[지극한 덕은 덮이어 분별하기 어렵구나]
애자방박질(愛茲磅礴質)[어여뻐라, 이 산의 충만한 본질]/ 함축근일설(涵蓄靳一洩)[모두 머금어 빈틈없어라]
뇌우불수산(雷雨不受鏟)[천둥과 폭우에도 깎이지 않고]/ 근보천소설(謹保天所設)[하늘이 만든 그대로 보전하나니]
자연유운무(自然有雲霧)[구름 안개 자연스레 피어나]/ 시창하토열(時滄下土熱)[때때로 대지 열기 식혀주네]
[특징]
「등서석산」은 다산 정약용이 17세 되던 해인 1778년에 쓴 오언율시이다. 다산은 1777년 16세 때 부친의 임지인 화순에서 형과 함께 수학하고 1779년 2월에 서울로 다시 올라가 그해 겨울 성균관 승보시(陞補試)에 합격한다. 「등서석산」은 부친의 임지인 전라도 화순에서 수학하던 1778년 여름과 가을 사이에 무등산 일대를 유람하면서 쓴 시이다.
[의의와 평가]
「등서석산」은 다산 정약용의 과거 합격 전 초기 작품 세계의 단면을 엿볼 수 있는 작품으로, 조선 후기 무등산의 모습을 추측할 수 있는 시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