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60004855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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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登無等山-金時習 |
분야 | 구비 전승·언어·문학/문학 |
유형 | 작품/문학 작품 |
지역 | 광주광역시 북구 금곡동 |
시대 | 조선/조선 전기 |
집필자 | 황민선 |
저자 생년 시기/일시 | 1435년 - 김시습 출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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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 몰년 시기/일시 | 1493년 - 김시습 사망 |
배경 지역 | 무등산 - 광주광역시 북구 금곡동 |
성격 | 한시 |
작가 | 김시습| |
[정의]
조선 전기 때 문인인 김시습이 무등산을 유람하고 지은 한시.
[개설]
「등무등산(登無等山)」을 지은 김시습(金時習)[1435~1493]은 생육신의 한 사람으로, 본관은 강릉(江陵), 자는 열경(悅卿), 호는 매월당(梅月堂)·청한자(淸寒子), 법호는 설잠(雪岑)이다. 5세 때 이미 시를 지을 줄 알아 신동이라는 소문이 세종에게까지 알려졌다. 이에 세종이 시험해 보고 크게 쓸 재목이니 열심히 공부하라고 당부하면서 선물을 내렸다고 하여 오세(五歲)라는 별호를 얻게 되었다. 1455년에 수양대군이 왕위를 찬탈한 소식[계유정난]을 듣고 승려가 되어 전국을 유랑하였다. 1465년에 경주로 내려가 경주 남산인 금오산에 금오산실(金鰲山室)을 짓고 칩거하였는데, 이때 매월당이라는 호를 사용하였다. 금오산실에서 1471년까지 최초 한문소설인 『금오신화』를 비롯하여 많은 시편을 남겼는데, 이때 쓴 시들은 『유금오록(遊金鰲錄)』으로 엮었다. 성종이 왕위에 오르자 1471년 서울에 올라와 성동(城東) 폭천정사(瀑泉精舍), 수락산 수락정사(水落精舍) 등지에서 10여 년을 생활하였으나 자세한 행적은 알려지지 않는다. 1481년 돌연 머리를 기르고 고기를 먹으며 아내를 맞이하였으나, 이듬해 폐비윤씨사사사건(廢妃尹氏賜死事件)이 일어나자 다시 관동 지방 등지로 방랑하였다. 이때 김시습은 지방 청년들을 가르치기도 하면서 100여 편의 시를 남겼는데 이 시들은 『관동일록(關東日錄)』에 수록되어 있다. 50대에 이르러서 충청도 홍산 무량사(無量寺)에서 기거하다 1493년에 병사하였다. 저서로는 『매월당집(梅月堂集)』, 『금오신화』, 『관동일록』 등이 남아 있다.
「등무등산」은 『매월당집』 권 11에 있는 『탕유호남록(宕遊湖南錄)』에 수록되어 있다. 『탕유호남록』은 김시습이 호남 지역을 유람하면서 쓴 시들을 모은 시문집이다.
[구성]
「등무등산」은 1구에 7자씩 모두 4구로 이루어진 칠언절구이다.
[내용]
등무등산(登無等山)[무등산에 올라]
애애산광적취람(藹藹山光滴翠嵐)[자욱한 산 빛은 푸른 남기 떨구고]/ 고저석경암정남(高低石逕暗檉枏)[높고 낮은 돌길은 능수버들로 어둑하네]/ 신사불자다교목(神祠佛宇多喬木)[신사와 사찰에는 높은 나무 많은데]/ 천근성진수가탐(天近星辰手可探)[하늘의 별들 가까워 손에 잡힐 듯하네]
[의의와 평가]
「등무등산」은 김시습의 시 세계 일면을 엿볼 수 있는 한편, 조선 전기 문인들의 무등산 유람 양상을 확인할 수 있는 시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