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60004520 |
---|---|
한자 | 金德齡-門- |
이칭/별칭 | 지공너덜 |
분야 | 구비 전승·언어·문학/구비 전승 |
유형 | 작품/설화 |
지역 | 광주광역시 북구 금곡동 |
시대 | 현대/현대 |
집필자 | 송기현 |
채록|수집|조사 시기/일시 | 1989년 - 광주광역시 북구 충효동 주민 유몽룡의 이야기를 채록 |
---|---|
수록|간행 시기/일시 | 1990년 - 「김덕령과 문바위」 『광주의 전설』에 수록 |
관련 지명 | 무등산 - 광주광역시 북구 금곡동 |
관련 지명 | 지공너덜 - 광주광역시 북구 금곡동 |
관련 지명 | 경양방죽 - 광주광역시 동구 계림동 |
채록지 | 광주광역시 북구 충효동 |
성격 | 설화|인물전설|지명전설|신이담 |
주요 등장 인물 | 김덕령|김덕령의 용마|지공대사 |
모티프 유형 | 무등산 지공너덜의 유래|김덕령의 용력 수련|용마의 죽음 |
[정의]
광주광역시 북구 충효동에서 전해 내려오는 김덕령과 관련한 용마 이야기.
[개설]
김덕령은 무등산의 문(門)바위에서 용력을 기르고 술법을 익혔다. 김덕령은 문바위에서 활을 쏜 뒤에 용마(龍馬)를 타고 달려가기를 반복했는데, 이는 용마의 능력을 시험하기 위한 것이다. 김덕령은 섣부른 판단으로 용마를 죽이고 말았다.
[채록/수집 상황]
광주광역시 북구 충효동에 거주하는 제보자 유몽룡의 이야기를 채록해서, 1990년 광주직할시가 간행한 『광주의 전설』에 수록하였다.
[내용]
지공너덜은 무등산 정상 아래, 해발 약 1,000~1,100m 사이의 남쪽에 있으며, 폭은 150m에 이르고 상부 경계가 아래로 들어간 혀 모양의 형태로 되어 있다. 옛날 인도 승려 지공대사(指空大師)가 이곳에 와서 석실(石室)을 만들고 좌선 수도하였다고 해서 지공너덜이라 불렸다.
보조국사(普照國師)는 지공너덜의 석실에 문바위를 세웠다. 김덕령은 용마를 타고 문바위에 와서 용력을 기르고, 술법을 익혔다. 어느 날, 김덕령은 용마에게 “내가 큰 일을 하려면 너부터 잘 달려야 한다. 이제 내가 활을 쏠 터인데 화살이 건너편 화순 마실리에 이르기 전에 네가 먼저 거기에 당도해야지 그렇지 못하면 네 목을 치겠노라”고 하였다. 용마도 김덕령의 말을 알아들은 듯 고개를 끄덕였다. 화살이 김덕령의 활시위를 떠나자마자 용마도 김덕령을 태운 채 쏜살같이 달렸다. 김덕령은 목적지에 도착했으나 화살이 보이지 않자 용마를 죽이려 했다. 이때 하늘 위로 화살이 지나갔다.
김덕령은 용마를 상대로 이와 같은 시험을 자주 하였다. 김덕령은 마지막 시험이라 생각하고 광주의 경양방죽을 향해 활을 쏘았다. 용마는 김덕령을 태우고 쏜살같이 달렸다. 김덕령은 경양방죽에 도착해서 한참을 기다려도 활이 보이지 않자 과감히 칼로 용마의 목을 쳤다. 잠시 후, 화살이 날아왔고, 이를 지켜본 김덕령은 크게 후회하였다. 이 광경을 지켜본 마을 사람들은 용마의 죽음을 애석하게 여겨 방죽 근처에 말을 묻고 용마비(龍馬碑)를 세웠다. 용마비는 경양방죽이 메워질 때 함께 묻혔다.
[모티프 분석]
「김덕령과 문바위」는 김덕령의 용마 관련 이야기이다. 용마는 영웅의 신이성과 비범성을 배가시킨다. 하지만 한국의 민중 영웅은 신화적 인물과 유사한 성격을 지니고 있지만, 성장하는 과정에서 몇 가지 결핍을 지니고 있어서 비극적인 죽음을 맞이하게 된다. 김덕령의 조급성과 섣부른 판단은 김덕령이 비범한 능력을 지녔음에도 불구하고 결국 비극적 죽음을 맞이하게 된 이유가 된다. 용마전설은 민중 영웅으로서 김덕령의 결핍을 드러내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