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6000433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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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水谷洞水谷-堂山祭 |
이칭/별칭 | 수곡동 수곡마을 동제 |
분야 | 생활·민속/민속 |
유형 | 의례/제 |
지역 | 광주광역시 북구 수곡동 |
시대 | 현대/현대 |
집필자 | 윤수경 |
중단 시기/일시 | 1940년대 일제강점기 말 - 수곡동 수곡마을 당산제 중단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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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례 장소 | 아랫당산 - 광주광역시 북구 수곡동 수곡마을 앞 |
의례 장소 | 윗당산 - 광주광역시 북구 수곡동 수곡마을 뒤 |
성격 | 마을 공동 제사 |
의례 시기/일시 | 정월 열나흘날 밤부터 대보름날 새벽까지 |
신당/신체 | 아랫당산[느티나무]|윗당산[느티나무] |
[정의]
광주광역시 북구 수곡동 수곡마을에서 마을의 안녕과 풍년을 기원하기 위해 정월 열나흗날 밤에 지내는 마을 공동 제사.
[개설]
수곡동 수곡마을 당산제는 마을 앞과 뒤에 있는 두 곳의 당산에서 마을 사람들이 함께 모셨던 공동 제의이다. 정월 열나흘날 밤부터 대보름날 새벽까지 모셨으나, 일제강점기에 중단되어 현재까지 행해지지 않고 있다.
[연원 및 변천]
현재 망월공원묘지가 있는 수곡동은 400여 년 전에 전주이씨(全州李氏)가 들어와 마을을 이루었다고 전해진다. 풍수적으로 마을 앞에 보이는 불태산과 병풍산으로 인해 화재가 날 위험이 있어 물 수(水) 자를 넣어 마을 이름을 '수곡'이라고 하였다는 설과 골짜기에 항상 물이 흘러 '수곡'이라고 하였던 설이 전한다. 그러나 1960년대 수곡제나 두촌제 등 저수지가 만들어지기 전까지는 그다지 물이 풍족하지 않은 지역이었음을 감안하면 첫 번째 설이 더 신빙성이 있어 보인다. 수곡동 수곡마을 당산제는 매년 정월 열나흗날 밤 11시 무렵에 시작하여 대보름날 새벽 3시 무렵까지 모셨으나, 일제강점기 말 일본인들의 탄압으로 중단되었다.
[신당/신체의 형태]
수곡마을의 당산은 느티나무이다. 마을 앞의 당산나무를 아랫당산으로, 마을 뒤편의 당산을 윗당산으로 모셨다. 현재 윗당산은 고사(枯死)되어 없어지고, 아랫당산은 수령 약 200여 년으로 수곡동 219번지에 있다. 아랫당산 부근에는 마을 공동샘이 있는데, 이 샘을 청소한 후에 깨끗한 물로 제물을 장만하는 데 사용하였다.
[절차]
수곡동 수곡마을 당산제는 정초가 되면 마을회의를 열어 축관, 헌관, 화주를 각 1명씩 선정하는데 부정을 피하기 위하여 깨끗하고 식구가 적은 사람으로 선정한다. 제관(祭官)들은 당산제가 끝날 때까지 비린 것을 먹지 않고 상가나 출산을 하는 집 등을 가지 않는 등 부정을 피하였으나, 화주 부부는 더욱 엄격하게 규율을 지켜야 하였다. 매일 마을 공동샘의 물로 목욕을 하고 제물(祭物) 장을 보고 온 이후에는 용변을 보면 목욕을 하고 옷을 갈아입어야 하였으므로, 장을 보는 날부터는 음식을 거의 먹지 않을 정도였다. 당산제 전에 화주는 마을 입구, 당산 주변, 화주의 집 앞과 샘 주변 등에 금줄과 금토를 쳐서 부정의 출입을 막았다. 제비(祭費)는 마을 각 집에서 거출을 하여 마련하는데, 돼지머리, 과일, 채소 등 비리지 않은 간단한 것으로 제물을 준비한다. 제기(祭器)는 매년 새 것으로 준비하고, 제물 준비 시에는 간을 미리 보지 않는 등 금기를 철저히 지켰다.
당산 제일(祭日)인 열나흗날 초저녁에 나발을 불어 제를 알린 후 굿꾼들은 마을 앞 공터에서 모닥불을 피우고 풍물을 친다. 밤 11시 무렵 당산제 시작 시간이 되면 화주집으로 가서 제관들의 뒤를 따르며 당산으로 향하였다. 아랫당산에 먼저 올라 일반 가정 제사의 절차대로 제를 올리고, 윗당산으로 향하는데 이때는 두루마기로 의관을 정제한 제관과 굿꾼들만 참여할 수 있었다. 아랫당산에서는 음복과 헌식을 하지 않고, 윗당산 제사가 끝난 후 돼지머리를 통째로 헌식하였다.
[현황]
수곡동 수곡마을 당산제는 일제강점기 말 일본인들의 탄압으로 인해 중단되었으며, 현재에도 제를 지내지 않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