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6000433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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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雲亭洞舟龍-堂山祭 |
이칭/별칭 | 운정동 주룡마을 동제 |
분야 | 생활·민속/민속 |
유형 | 의례/제 |
지역 | 광주광역시 북구 운정동 |
시대 | 현대/현대 |
집필자 | 윤수경 |
중단 시기/일시 | 1940년대 일제강점기 말 - 운정동 주룡마을 당산제 중단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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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례 장소 | 당산 - 광주광역시 북구 운정동 주룡마을 뒷산 |
성격 | 마을 공동 제사 |
의례 시기/일시 | 정월 열나흗날 |
신당/신체 | 당산[소나무] |
[정의]
광주광역시 북구 운정동 주룡마을에서 마을의 안녕과 주민들의 건강을 기원하기 위해 정월 열나흗날에 모셨던 마을 공동 제사.
[개설]
운정동 주룡마을 당산제는 마을의 안녕과 주민들의 건강을 기원하며 당산나무에서 주룡마을 사람들이 지냈던 마을 제의로, 정월 열나흗날 밤 11시 무렵에 모셨다. 일제강점기 말에 중단되었다고 하는데, 일제의 억압과 물질적 궁핍으로 인해 중단된 것으로 보인다.
[연원 및 변천]
주룡마을은 황룡이 배를 등에 지고 있는 형국의 명당이 있다고 전해져 '주룡(舟龍)'이라고 불렸다. 약 200여 년 전에 함양박씨(咸陽朴氏)와 천안김씨(天安金氏) 등이 자리를 잡아 마을이 시작되었다고 전해진다. 당산제가 언제부터 시작되었는지에 대한 기록이나 구전은 없으며, 일제강점기 말에 일본인들의 억압과 마을의 물질적 궁핍으로 의해 중단되었다고 전해진다.
[신당/신체의 형태]
주룡마을의 당산은 마을 뒷산 고갯마루에 있는 소나무이다. 총 3그루가 있었는데 2그루의 여자나무가 10미터 정도 간격을 두고 있었고, 그 사이에 작은 남자나무가 있었다고 하나 현재는 고사(枯死)하고 없다.
[절차]
운정동 주룡마을 당산제는 매년 정월 11~12일 무렵에 마을회의를 열고 깨끗한 사람을 유사로 정한다. 유사(有司)[당산제나 모임의 행사를 주관하는 사람]는 매일 마을 앞 샘물을 길러 목욕을 하고 화장실에 갔다 오면 목욕을 하는 등 부정한 것을 피하며 생활한다. 제의(祭儀) 일주일 전에 이장이 주도하여 마을 청년들과 함께 마을 입구와 당산 주변에 금줄을 치고 금토를 놓는다. 마을 각 집마다 제비(祭費)를 갹출하여 제물(祭物)을 장만하는데, 유사의 집에서 정결한 사람들이 함께 준비한다. 제기(祭器)는 보관해 두었다가 다시 사용하며 이를 빌려다 사용할 수는 없다. 이렇게 준비된 제물은 제관(祭官)들이 지고 당산으로 오르는데 농악대가 그 뒤를 따른다. 농악굿은 정월 열나흗날 저녁부터 당산에서 당산굿, 마을 앞 큰샘에서 샘굿 등의 순서대로 하며 밤중에 자진 해산한다. 당산제 절차는 일반 제사와 유사하게 진행되었으며, 제관은 두루마기에 유건을 쓰고, 소지, 음복은 제관들만 간단히 하였다. 당산 옆에 땅을 파고 돼지머리와 명태머리 일부를 백지에 싸서 묻는 것으로 간단한 헌식을 행하였다. 제의 시작과 끝은 나발을 불어 알렸다.
[부대 행사]
당산제가 끝나고 정월대보름부터 마당밟이를 행한다. 원하는 가정에서만 걸궁(乞窮)[자금을 마련하기 위해서 마을 집집을 돌아다니며 악기를 연주하거나 축원의 노래를 불러주는 일]을 하고 형편대로 내주는 쌀이나 돈을 모아 마을 공동기금으로 사용하였다. 2월 1일이 되면 마을총회를 열어 이에 대한 결산을 하였다.
[현황]
운정동 주룡마을 당산제는 일제강점기 말에 일본인들의 억압과 마을의 물질적 궁핍으로 인해 중단되었고, 현재까지도 진행되지 않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