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6000080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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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花郞團 |
영어공식명칭 | Hwarangdan |
분야 | 역사/근현대 |
유형 | 기관 단체/기관 단체(일반) |
지역 | 광주광역시 북구 독립로237번길 33[누문동 144] |
시대 | 현대/현대 |
집필자 | 이연숙 |
설립 시기/일시 | 1945년 8월 15일 - 화랑단 설립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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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초 설립지 | 화랑단 - 광주광역시 북구 독립로 237번길 33[누문동 144] |
성격 | 청년단체 |
설립자 | 광주고등보통학교 및 광주서중학교 동문 |
[정의]
1945년 8월 15일 광주광역시에서 광주고등보통학교 및 광주서중학교(현 광주제일고등학교) 졸업생들이 결성한 청년단체.
[설립 목적]
화랑단은 광주고등보통학교 출신 졸업생 및 광주서중학교 동문들이 1945년 8월 15일 해방 이후 정부 수립에 협조하고 사회질서 유지에 앞장설 것을 목적으로 설립하였다.
[변천]
화랑단은 1945년 8월 15일 오후 5시, 광주고등보통학교 및 광주서중학교 졸업생 100명이 광주서중학교 강당에 모여 결성한 청년단체이다.
화랑단은 결성 직후, 곧바로 단장에 김창선(金昌鮮)[광주고보 1회 졸업생, 전남도청 조선인청년단장 겸임], 부단장에 이창업(李昌業), 총무부장 김병택(金炳宅) 등을 임원으로 선출하며 활동을 시작하였다. 이들은 안재홍 및 조선건국준비위원회에 청년부장 강봉섭(姜鳳燮)을 대표로 보내, 화랑단의 결성 소식을 알리기도 하였다. 설립 당시 화랑단 운영 비용은 당시 조선은행 광주지점에 근무 중이던 화랑단원 정영범(鄭泳範)이 이신범(李信範)에게 사례조로 받은 1만원으로 충당하였다고 한다.
화랑단 본부는 정영범의 집에 두었고, 현덕신(玄德信)의 병원 사무실로 변경되었다가 다시 광주서중학교 내부로 옮겨졌다. 이후 1946년 1월 17일자 『동아일보』기사에 따르면, 화랑단은 "우리 조선민족의 최고요 유일인 대한민국임시정부를 중심으로 한데 뭉쳐 하로바삐 완전독립을 하자"는 "임정 지지"의 목적 아래, 광주청년단으로 통합되었다.
[주요 사업과 업무(활동 사항)]
화랑단의 첫 활동은 결성 당일 시가행진과 광주신사의 파괴였다. 화랑단원들은 8월 15일 결성 직후 광주서중학교 정문에서 시가행진을 시작하여 충장로를 통과, 남광주역까지 이동하였는데, 이 과정에서 시민들이 합세하자 광주공원으로 몰려가 광주신사를 헐어버렸다.
결성 이후 화랑단의 주요 활동은 친일 조선인 경찰, 특히 광주학생운동 당시 학생들을 고문했던 이들에 대한 '심판'이었다. 이를 위해 심판장으로 김창선, 배심으로 이창업, 정영범을 세우고, 약 5명의 일제하 친일 경찰들을 붙잡아 판결에 따라 수십 대의 매를 가했다고 한다. 이 외에도 1945년 12월 16일자 『광주민보』에는 화랑단 문예부가 광주극장에서 「풍월서당」과 '미친 총각들 최서방(崔書房)'이라는 연제(演題)로 제 1회 공연을 예정하고 있다고 전하고 있어 문화공연 활동도 했음을 짐작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