콘텐츠목차

메타데이터
항목 ID GC030C010104
지역 서울특별시 구로구 수궁동
시대 현대/현대
집필자 이윤정

서울특별시 중구 소공동은 조선 태종의 둘째 딸인 경정공주가 살던 궁이 있어 ‘작은공주골’이라 불렸다. 한자로 소공주동(小公主洞). 한 음절을 줄여 현재는 ‘소공동’이라 부른다. 이처럼 공주나 옹주가 살던 집으로 인해 마을 이름이 정해진 곳이 바로 구로구 ‘궁동’이다.

필자는 궁동에 있는 ‘궁’의 흔적을 찾기 위해 서서울생활과학고등학교에 세워져 있는 ‘궁골[宮谷] 유허비’로 향했다.

[안동권씨 집안으로 출가한 조선의 옹주]

서서울생활과학고등학교 2관 앞, 정문에서 안쪽으로 약 50m 지점에 궁골 유허비가 있다. 유허비에는 “궁골[宮谷]: 조선조 제14대 선조대왕의 7녀 정선옹주(貞善翁主)가 이곳 안동권씨 가로 출가하여 옹주궁이 있었던 곳임[현재 좌측 능선에 옹주 묘소가 있음]”이라고 적혀 있다.

정선옹주[1594~1614]는 선조의 후궁(後宮) 정빈 민씨의 소생이다. 정빈은 어질고 예를 갖춘 사람이었으며, 정선옹주 또한 공손하고 부녀자의 덕에 어긋남이 없었다고 전해진다. 정선옹주가 출가한 ‘안동권씨’ 가문의 인물로는 조선 선조 때 영의정을 지냈던 권철(權轍)과 그의 아들로 임진왜란 때 행주대첩의 공을 세운 도원수 권율(權慄)이 있다. 또 정선옹주의 부군 권대임(權大任)[1595~1645]은 용모가 수려하고 공부를 잘했을 뿐만 아니라 명필가였다고 한다. 권대임의 할아버지 권협(權悏)은 선무공신으로 예조판서를 지내고 충정공(忠貞公)을 하사받았다.

[궁궐 같은 집이 있던 마을]

궁궐 같은 집이 있었다는 ‘궁골’이란 마을 이름은 정선옹주 궁과 관련이 있다.

옹주가 출가하자 세조는 지금의 궁골 일대를 ‘사패지’로 하사했다. 사패지[사전(賜田)이라고도 하며, 왕이 내려 준 논밭을 말함]는 보통 당대 혹은 2~3대를 이어받을 수 있도록 했지만 대부분 기한이 지나도 국가에 반납하지 않고 자손 대대로 사패지를 이어 가는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사패지의 면적에 대해서는 ‘사방십리’ 또는 ‘밤에 촛불을 켰을 때 그 불빛이 비치는 곳까지 전부’라는 말이 있을 정도로 규모가 상당했던 것으로 전해진다.

세조 때 이미 세도가로 자리 잡은 안동권씨 가문에 옹주가 시집을 오자 사패지에는 으리으리한 옹주궁이 들어섰을 것으로 추측된다. 고대광실이었던 집을 보며 사람들은 그 집이 궁궐 못지않다 하여 ‘궁마을’로 부르기 시작한 것이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옹주궁의 흔적은 남아 있지 않다. 권창호[1950년생] 씨는 “어른들로부터 옹주궁이 700여 평[약 231㎡] 규모에 50칸 대궐이었다고 들었어요. 6·25때 가족들이 충북 괴산으로 피난을 다녀왔는데, 그 사이 집이 다 전소됐다더군요.”라고 이야기해 주었다.

[역사의 한 장으로 남은 옹주 묘]

궁동 주민들에 따르면 서서울생활과학고등학교가 들어오기 전 정선옹주가 살던 집은 밭으로 이용되었다고 한다. 권창호 씨는 “밭을 일구면서 기왓장, 옹기 조각 등 유물이 나오기도 했어요. 집이 으리으리했다고 하는데 사진 한 장 남은 게 없으니…….”라고 말끝을 흐렸다.

현재 궁동에는 옹주궁 터 옆 궁동 산6-1번지정선옹주 묘역’이라 불리는 곳에 권협 공으로부터 5대에 걸친 안동권씨 문중 선영이 남아 있어 궁궐 같던 마을의 옛 모습을 짐작하게 할 뿐이다.

2010년 9월 구로구는 정선옹주 묘역 일대를 정비해 ‘휴식 역사 공간’으로 꾸미겠다고 발표했다.

그리고 수궁동 주민자치위원회와 함께 묘역 일대를 정비하면서 정선옹주의 부군 권대임의 업적을 적은 신도비를 복원하고 안내판을 설치했다.

또 각종 역사 지역 알기 교육 프로그램을 운영해 청소년을 위한 학습 공간으로도 꾸밀 예정이다. 구로구 관계자는 “묘역이 궁동생태공원과 인접해 있기 때문에 친환경적인 공간에서 휴식을 취하고 역사도 배울 수 있는 명소로 육성하고, 문화재 지정을 위한 활동을 펼칠 계획”이라고 밝혔다.

[정보제공]

  • •  권창호(남, 1950년생, 구로구 수궁동 주민, 수궁동 주민자치위원장)
[참고문헌]
등록된 의견 내용이 없습니다.
네이버 지식백과로 이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