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30C010103 |
---|---|
지역 | 서울특별시 구로구 수궁동 |
시대 | 현대/현대 |
집필자 | 이윤정 |
1988년 신설된 수궁동은 온수동과 궁동을 관할하는 행정동으로, 온수동의 ‘수’와 궁동의 ‘궁’을 따서 만든 이름이다.
궁동은 세조의 일곱 번째 딸인 정선옹주의 궁이 있었다 하여 붙은 지명이다. 그렇다면 ‘온수동’의 지명은 어디에서 유래된 것일까.
[임금에게도 숨긴 온천수]
전국의 호수(戶數)와 인구수를 기록하여 1789년(정조 13)에 편찬된 『호구총수(戶口總數)』에는 수탄면(水呑面) 내에 온수동리(溫水洞里)와 궁리(宮里)가 명시돼 있다.
온수동리는 더운 물이 나왔다는 ‘온수골’에서 유래한 이름이다.
이와 관련해 『세종실록(世宗實錄)』권83의 세종 20년[1438년] 11월 8일자에는 다음과 같은 내용이 실려 있다.
“부평도호부를 현으로 강등했는데, 임금께서 부평에 온천이 있다는 말을 들으시고, 조정의 신하를 여러 차례 보내어 찾아보라고 했던 바, 그곳 아전과 백성이 숨기고 말을 듣지 않으므로 도호부를 폐하고 현으로 강등했다…….”
평소 피부병과 안질로 고생하던 세종은 평산과 이천, 온양 등지의 온천을 즐겨 찾았다. 그러던 중 한양과 좀 더 가까운 곳에서 온천욕 할 곳을 찾다가 지금의 ‘온수동’으로 사람을 보냈다. 그런데 재미있는 점은 주민들이 ‘온천’을 숨겼다는 데 있다.
당시 온천수가 나왔다는 온수골은 지금의 초원교회에서 태영렉스빌 일대를 일컫는 옛 지명이다.
온수동 주민 동귀원[1954년생] 씨는 “여기가 온천이 있었다는 거 아니에요. 그런데 온천이 있다고 소문이 나면 피부병 환자는 물론이고 나병[한센병] 환자들이 몰리니까 아예 온천 구멍을 막아 버린 거예요. 그걸 아직까지 못 찾는 거예요.”라고 말했다.
조선 전기 온천욕을 하기 위해 피부병 환자며 나병 환자들이 전국에서 몰려들어 주민들이 불쾌감을 느낀데다 뜨거운 물이 논에 극심한 피해를 주자 주민들이 온천수의 맥을 흙과 돌로 막고 나라에 온천수가 나오는 것 자체를 비밀에 부쳤다고 한다. 이 온천수를 찾지 못한 세종이 부평부사를 문책하고 부평도호부를 부평현으로 강등시켜 버린 것이다.
[유황 온천의 맥을 찾는 사람들]
“아휴~ 말도 마세요. 온수동에 온천 구멍을 100개도 넘게 파 봤지. 온천 개발하다가 빈털터리 돼서 나간 사람도 많아요.”라는 온수동 주민의 말처럼 역사적으로 온수골 인근에서 온천 맥을 찾으려는 시도는 끊임없이 이어져 왔다. 1920년에는 일본 사람들이 온천수를 찾으려다 실패했고, 해방 후인 1969년과 1970년, 1985년에도 계속해서 온천수 개발을 시도했으나 모두 실패했다. 결국 온천 구멍을 찾지 못한 채 온수골에는 빌라들이 들어섰다.
1991년 온수골 뒷산 자락에서 온천 개발을 한 김철수[가명, 1925년생] 씨는 “1천m 넘게 땅속을 파내려 가니까 섭씨 31도의 온천수가 나오더라고. 물에서 삶은 달걀 냄새가 나는 걸 보고 유황 온천인 걸 알았지.”라고 말한다. 하지만 온천을 개발할 수는 없었다고 한다. 와룡산 일대가 그린벨트 지역으로 묶인데다 지하철 7호선 온수역이 지하를 관통하면서 온천 구멍을 막아야 했다. 2000년 7월 25일에는 수맥 탐사 전문가 유준혁 씨는 궁동 189번지 교통안전공단 부지에서 온천수가 나올 확률이 높다는 조사 결과를 내놓기도 했다.
마을 주민들 역시 “온천 나오면 우리 마을 부자 되겠지.”라며 기대심을 내보이기도 했지만 2010년 현재까지 온천수는 아직 발견되지 않고 있다. 온수동의 ‘온천 전설’은 무한한 가능성을 안은 채 여전히 ‘온천 맥’을 찾는 사람들의 관심을 모으고 있다.
[정보제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