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30A010103 |
---|---|
지역 | 서울특별시 구로구 구로동 |
시대 | 현대/현대 |
집필자 | 이다일 |
구로동과 가리봉동에서 만난 노인들이 한결같이 하는 말이 있었다. 바로 “장화 없이는 못 사는 동네지.”, “마누라 없이는 살아도 장화 없으면 못 산다 했어.”라는 말이었다. 가리봉2동 골말경로당에서 만난 윤묘병[1927년생] 씨는 “내 어렸을 때는 여기 장마라도 오면 난리가 났었지.”라는 말로 옛 시절의 고단함을 털어놓았다. 노인들의 증언에 따르면, 장마철이면 지금의 대림역과 구로디지털단지역 아래에 있는 도림천 물이 넘쳐서 근처에 있는 도로며 집들까지 집어삼켜 여간 큰 불편을 겪은 게 아니었다고 한다.
[천수답 농사로 끼니 걱정 없던 동네]
50여 년 전만 해도 지금의 구로구 구로3동과 구로4동은 농사를 짓던 평야 지대였다. 가리봉동에 있는 낮은 언덕은 시흥으로 가려면 꼭 넘어야 하는 ‘산’이었다. 구로동은 인근에 안양천과 도림천이 있고 땅도 평평해서 농사가 발달했다. 구로구에서 500년째 대를 이어 살아오고 있는 박명재[1932년생] 씨는, “여기 사는 대부분의 사람들은 부자는 아니어도 그래도 먹고사는데 지장 없는 사람들이었어요.”라고 말했다.
산업화가 일어나기 직전인 1960년대 초반만 해도 구로동 땅은 대부분 농지였다. 모두 논에는 벼를 심고 밭에는 푸성귀를 가꾸었다. 높지 않은 구릉진 산에는 일제 강점기부터 심어 놓은 복숭아밭이 넓게 펼쳐져 있었다. 인근의 도림천과 안양천에서 물을 끌어 오기도 쉬웠고, 하늘에서 내린 비로 농사를 지어도 충분했다.
[도림천 범람으로 피해를 입던 구로동]
40~50년 전 농사짓는 시골 풍경이 다 그랬듯이 구로동 지역도 여느 농촌과 다를 것이 없었다. 소달구지로 짐을 싣고 다녔고 지게를 지고 논두렁을 걸어 다녔다. 박명재 씨는 “당시는 농사짓는 동네였으니 물이 많은 게 좋았지, 너무 많으면 안 되지만…….”라며 유년기에 뛰어놀던 동네 모습을 묘사해 줬다.
박명재 씨의 집은 지금의 구로3동 지역에 있었다. 논에서 조금 더 높은 언덕 초입이었다. 집에서 영등포까지 가려면 논두렁을 지나 좁은 길로 걸어 다녀야 했다. 일제 강점기의 구로동은 여느 농촌의 모습과 똑같았다.
하지만 세월이 지나면서 모습도 달라졌다. 1969년 구로동으로 이사 온 이인엽[1955년생] 씨는, 비가 오면 도림천이 넘쳐서 물난리가 났다고 옛날을 회고했다.
1968년과 1970년에도 태풍이 와서 도림천이 넘쳤다.
이인엽 씨의 기억에, 도림천에서 지금의 보성운수 자리까지 물이 차올랐는데, 지금의 두산아파트 지역과 보성운수 자리는 고도 차이가 있어서 다행스럽게도 동네 일부만 수해를 입었다고 한다.
[구로동에서 다리 건너 대림동 가려면 통행료를 냈어]
이인엽 씨가 인터뷰를 하던 중에 재밌는 이야기를 했다. 때는 1970년대로, 구로동에 공장이 많이 들어서면서 사람들이 공장으로 출퇴근을 하던 때였다. 이야기의 핵심은 사람들이 지금의 대림역 아래 도림천에서 나무로 엉성하게 만든 다리를 놓고 돈을 받으며 통행시켜 줬다는 얘기다. 이인엽 씨는 “그때 1원인지 얼마인지는 오래돼서 기억을 잘 못하지만 돈을 받고 다리를 건너게 해 줬다.”고 말했다. 그 다리를 건너 대림동 너머에 살던 사람들이 구로공단으로 일하러 다녔다는 것이다.
물론 지금은 대림역 인근 도림천에서 다리의 흔적은 찾아볼 수 없다. 대림역과 구로디지털단지역으로 이어지는 2호선 고가 도로는 도림천을 따라서 이어진다. 그 아래는 하천 정비를 통해 안양천까지 이어지는 산책로가 형성돼 있다. 하천 변에는 농구장, 배드민턴장 등 운동 시설을 마련해 놓아 사람들이 많이 찾아온다.
이제는 장마 때가 되어도 물이 차는 지역은 없다. 1990년대 중반 들어 하천이 개발되면서 상습 침수 구역이던 대림역 인근에 빗물배수펌프장을 만들었기 때문이다. 그 덕분에 지난 2007년 안양천이 범람하여 인근 고수부지 공원이 모두 침수됐을 때도 구로동에서는 아무런 피해도 없었다고 한다.
[정보제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