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300145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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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平常服 |
영어음역 | Pyeongsangbok |
영어의미역 | Usual Clothes |
이칭/별칭 | 상의(常衣),통상복,평복(平服) |
분야 | 생활·민속/생활 |
유형 | 개념 용어/개념 용어(일반) |
지역 | 서울특별시 구로구 |
시대 | 현대/현대 |
집필자 | 김영순 |
[정의]
서울특별시 구로 지역에서 주민들이 평상시에 입던 의복.
[개설]
평상복은 상의(常衣)·통상복·평복(平服)이라고도 불린다. 우리나라 평상복은 민족적·지리적으로 동북에 숙신족, 서북쪽에 선비족과 돌궐족, 서쪽에 한족 등과 교류하면서 많은 영향을 받았다. 북방 기마 민족의 옷에 영향을 받아 추위와 유목 생활에 알맞은 소매와 바지폭이 좁고, 저고리와 바지 분리형 양식이 자리 잡았다. 때로는 외부의 영향을 받아 큰 변화를 가져온 적도 있지만 저고리, 바지, 치마, 두루마기로 대표되는 서민의 기본 평상복은 그대로 이어져 왔다.
[변천 및 현황]
삼국시대 구로 지역 거주민들은 한강 일대를 지배했던 세력이 누군가에 따라 당시 지배 세력의 복식 문화를 반영한 복장들을 착용했다고 볼 수 있다. 구로 지역은 삼국시대에 본래 백제의 영토였으나, 474년 고구려 장수왕이 백제 세력을 누르고 한강 이남 쪽으로 남하 정책을 취하면서 이 지역에 잉벌노현(仍伐奴縣)[지금의 시흥시와 광명시 지역]을 설치하였다.
이런 역사의 기록으로 보자면 현재 구로 일대에는 삼국시대 이후부터 사람들이 거주했던 것으로 추정할 수 있다. 삼국시대에 한반도는 전반적으로 의복의 재료인 직물이 크게 발달하여 견직물만 해도 주(紬)·능(綾)[비단]·사(紗)·라(羅) 등이 다양하게 생산되었고, 모직물도 전·백류·포 등 여러 가지가 생산되었다. 이 시대의 또 다른 중요한 특색은 국가 체제의 확립과 더불어 계층화된 신분 제도로서, 복식도 일부 특권층의 것과 일반 서민의 것에 차등을 둠에 따라 평상복도 귀족복과 서민복으로 구분되게 되었다.
통일신라시대 복식 문화는 백제와 고구려, 당의 문화를 많이 수용했다. 그렇지만 통일신라 말기로 가면서 정치적으로 혼란해지기 시작하면서부터 복식 생활에도 지대한 영향을 미쳐서, 백성들의 평상복이 사치해져 허식화 되고 예절에 어긋나는 경향마저 띠게 되었다. 이로 인해 문란해진 복식 문화를 바로 잡기 위해 834년에 복식 금제령이 내려졌다.
고려 때는 중국과의 정치적인 대외 관계에 따라 복식 제도가 3차례 걸쳐 변화되었다. 제1기는 송나라의 영향을 받아 변화하였고, 제2기는 원의 침입으로 몽고 복식의 영향을 받으면서 생긴 변화였으며, 제3기는 명의 영향권에 들면서 생긴 변화이다. 그러나 이런 대외의 영향들은 주로 관복 제도에 변천을 가져왔을 뿐, 일반의 평상복은 우리 고유의 복식 구조와 크게 다를 바가 없었다고 추정된다.
고려시대 복식 생활에서의 두드러진 특징은 문익점이 목화씨를 들여와 목면이 전래되면서부터이다. 이것이 비단이나 명주를 마음대로 입을 수 없었던 서민의 복식 생활에 커다란 전환점으로 자리 잡아 평상복에 일대 혁신이 일어났을 것으로 추정된다.
조선시대 복식은 개국 초기에는 고려의 제도를 그대로 이어 받았다가 1474년(성종 5) 『국조오례의(國朝五禮儀)』의 편찬으로 의례복이 법제화되고, 『경국대전(經國大典)』의 편찬으로 백관들의 복식 제도가 재정비 되었다. 한편 서민 복식은 엄격한 신분 제도에 묶여 직물의 종류, 색깔, 문양 등에 이르기까지 전 시대보다 한층 심한 규제를 받았다. 조선 후기의 복식은 실학사상의 영향으로 외국 문화의 간섭을 배제하면서 독자적인 복식 문화를 형성해 나갔다. 조선 말엽의 복식이 단순화되는 과정도 특히 관복에서 많이 나타난다. 일반적으로 조선 후기 이후의 복식은 실용화 내지 평등화 쪽으로 나아갔다고 평가 받는다.
개화기에 이르러 우리의 복식은 중국과 서양, 그리고 우리나라 고유의 의상이 융합된 복식의 변천을 보여 준다. 의복 제도의 개혁에 의해 남자의 복식은 관복 및 사복의 변천과 아울러 양복의 착용에서 복식의 변화를 살펴볼 수 있으며, 여자의 복식도 한복을 개량하여 착용한 것과 양장을 착용한 것에서 그 특징을 볼 수 있다.
광복 이후의 복식은 그동안 일제로부터 받았던 복식 제도 통제에 대한 반발로 인해 한복을 많이 입었다. 그러나 한국전쟁 이후 쏟아져 들어온 미국으로부터의 구호품 의복으로 다시 양복이 대중화되기에 이르렀고, 급기야는 평상복으로 자리를 굳히게 되었다. 1950년대 후반에 이르러서는 한복이 명절이나 행사 때 입는 예복으로 인식되기 시작하였다.
구로 지역의 경우 1960년대 경제 발전을 위한 구로공단의 설립으로 인해 근로자 복장인 작업복, 새마을복, 민방위복, 군복 등이 유행하였다. 당시 수궁 동장으로 근무했던 김정진[남, 63세]에 따르면, 구로의 공무원 사이에서는 당시 박정희 대통령이 현장을 순시할 때 입었던 재건복이 유행했다고 한다. 또한 하준여[여, 68세]에 의하면, 구로 지역 주부들 사이에서는 입기 편하고 활동이 간편한 월남치마와 몸뻬바지가 유행했다고 한다.
1970년대 이후 경제가 성장하고 사회, 문화 등도 꾸준한 발전을 보여 복식 생활도 다양한 변천을 거듭하였다. 요즘의 구로 지역 주민들은 간편하고 기능적인 신생활 복을 주로 착용하고 있다. 특히 구로디지털단지 주변에 구로 패션 디자인 산업 단지가 들어와 구로 지역은 현재 명실공히 한국의 패션을 주도하는 지역으로 자리매김 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