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3000546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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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兪瑒 |
영어음역 | Yu Chang |
이칭/별칭 | 백규(伯圭),추담(楸潭),운계(雲溪) |
분야 | 역사/전통 시대,성씨·인물/전통 시대 인물 |
유형 | 인물/문무 관인 |
지역 | 서울특별시 구로구 |
시대 | 조선/조선 후기 |
집필자 | 양윤모 |
[정의]
조선 후기 구로 지역에서 활동한 문신.
[가계]
본관은 창원(昌原). 자는 백규(伯圭), 호는 추담(楸潭)·운계(雲溪). 아버지는 서윤 유여해(兪汝楷)이다.
[활동사항]
유창(兪瑒)[1614~1692]은 1635년(인조 13)에 생원이 된 뒤 1650년(효종 1) 증광 문과에 을과로 급제하여, 1653년 세자시강원설서를 거쳐 이듬해에 사헌부지평이 되었다. 1655년(효종 6) 통신부사로 일본에 다녀온 이후 1658년(효종 9) 7월부터 1660년 6월까지 지금의 구로 지역을 관할하는 부평부사로 활약하였다. 이후 승정원동부승지와 충청도관찰사에 이어 1662년(현종 3) 승정원우부승지에 임명되었다. 다음 해 승정원좌승지를 지내고 광주목사(廣州牧使)로 나갔다.
1666년(현종 7) 승정원의 승지를 거쳐 수원부사에 재임 중 진상물을 병조판서 홍중보(洪重普)에게 임의로 주었다가 발각되면서 파직되어 철원 풍전역에 유배되었다. 뒤에 풀려 나와 병조참판이 되었고, 1674년(현종 15) 고부사(告訃使)로 청나라에 다녀왔다. 이때 서장관(書狀官)이었던 권해(權瑎)와 사적인 감정으로 불화하였다며 탄핵을 받고 파직되었다. 얼마 있지 않아 다시 등용되어 1679년(숙종 5) 승지가 되었다.
한편, 예조참의로 있을 때에 허견(許堅)이 복창군(福昌君) ·복선군(福善君) ·복평군(福平君) 등과 역모를 꾀한다는 김석주(金錫胄)의 고변으로 옥사가 일어나자, “허견의 흉모를 허적(許積)이 확실히 알고 있었다는 사실이 세 가지인데도 대간은 다만 율(律) 대로 처단하기만 청하고 국문하기를 청하지 않았으니 그 까닭을 알지 못하는 바이며, 처음부터 잡아 오기를 청하지 않은 것이 벌써 옥(獄)을 다스리는 체통에 잘못된 것인데, 놓아 보내라는 전교를 받고는 한마디도 역적을 다스리자는 말이 없었으니 어찌 이럴 수가 있겠는가!”라는 소를 올리기도 하였다. 1689년(숙종 15) 개성부유수가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