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300044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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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成世章 |
영어음역 | Jeong Sejang |
이칭/별칭 | 경회(景晦),중회(仲晦),사암(思庵) |
분야 | 역사/전통 시대,성씨·인물/전통 시대 인물 |
유형 | 인물/문무 관인 |
지역 | 서울특별시 구로구 |
시대 | 조선/조선 전기 |
집필자 | 남달우 |
[정의]
조선 전기 금천현 출신의 문신.
[가계]
본관은 창녕(昌寧). 자는 경회(景晦)·중회(仲晦), 호는 사암(思庵). 아버지는 감찰을 지낸 성희문(成希文)이고, 양아버지는 성희공(成希恭)이다.
[활동사항]
성세장(成世章)[1506~1583]은 김안국(金安國)의 문인으로, 1540년(중종 35) 진사로 식년문과에 갑과로 급제, 1544년 헌납이 되었다. 1545년(인종 1) 지평, 이듬해 부교리·수찬·검상·사도시정(司䆃寺正) 등을 지냈다. 1548년(명종 3) 사인·집의·경기도암행어사에 이어서 응교·사간·도승지를 거쳐 동부승지로 참찬관(參贊官)을 겸직하였다. 이후 2년간 여러 승지를 지낸 뒤 1553년(명종 8) 호조참판이 되었다. 다음해 경기도관찰사, 1557년(명종 12) 동지중추부사·부제학·대제학·공조참판·대사간·병조참판 등을 지냈다.
1563년(명종 18) 한성부좌윤·함경도관찰사, 1565년(명종 20) 형조참판, 1567년(명종 22) 형조판서를 지냈다. 이듬해 한성부판윤·호조판서를 역임하였고, 1573년(선조 6) 등극부사(登極副使)로 명나라에 다녀와서 예조와 호조의 판서에 이어 우참찬이 되었다. 1576년(선조 9)에는 다시 예조판서를 지냈다. 이기(李芑)가 구수담(具壽聃)에게 죄를 주려는 데 대한 잘못을 논박한 바 있으며, 윤원형(尹元衡)의 매관매직하는 잘못을 충고하기도 하였다. 청백리(淸白吏)에 녹선되었다.
[저술 및 작품]
사도시정으로 춘추관편수관을 겸직하면서 『중종실록(中宗實錄)』·『인종실록(仁宗實錄)』의 편찬에 참여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