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3000415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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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李叔蕃 |
영어음역 | Yi Sukbeon |
이칭/별칭 | 백응(伯應),운정(芸亭),충숙(忠肅) |
분야 | 역사/전통 시대,성씨·인물/전통 시대 인물 |
유형 | 인물/문무 관인 |
지역 | 서울특별시 구로구 |
시대 | 조선/조선 전기 |
집필자 | 안홍민 |
[정의]
조선 전기의 문신.
[가계]
본관은 안성(安城). 자는 백응(伯應), 호는 운정(芸亭). 할아버지는 이사정(李思正)이고, 아버지는 이경(李坰)이며, 어머니는 남휘주(南輝珠)의 딸 영양남씨(英陽南氏)이다. 부인은 첨서중추원사(簽書中樞院事) 서원군(西原君) 정총(鄭摠)의 딸이며, 칠원부원군(漆原府院君) 윤자당(尹子當)과는 동모이부(同母異父)의 형제이다.
[활동사항]
이숙번(李叔蕃)[1373~1440]은 1393년(태조 2) 식년시 병과에 7등으로 급제하였다. 1398년(태조 7) 지안산군사(知安山郡事)로 있으면서 이방원(李芳遠)[훗날 태종]을 도와 사병을 출동시켜 세자 이방석(李芳碩)을 비롯하여 정도전(鄭道傳)·남은(南誾)·심효생(沈孝生) 등을 제거하는 데 공을 세워 승정원우부승지에 임명되었다. 그 뒤 이방원의 최측근이 되어 정종이 제2대 왕위에 오르자 이방원에게 “공(公)을 왕으로 추대하고 싶을 뿐이다”라고 말하였다.
1399년(정종 1) 승정원좌부승지를 역임하였고, 이듬해 초에 박포(朴苞)가 이방원과 반목하던 방간(芳幹)을 충동하여 거병하자 군사를 동원하여 이들을 진압하였다. 곧 좌군총제(佐軍摠制)가 되었고, 1402년(태종 2) 새로 설치한 내갑사(內甲士)의 좌번(佐番) 책임자가 되었고, 지승추부사(知承樞府事)가 되었다. 이해 말 안변부사 조사의(趙思義)가 반란을 일으키자 도진무(都鎭撫)가 되어 좌도도통사와 함께 출정하여 진압하였다.
이어 지의정부사(知議政府事)·참찬의정부사(參贊議政府事)가 되었고, 1405년(태종 5) 지공거(知貢擧)에 선임되었다. 1406년 겸중군총제(兼中軍摠制)·겸판의용순금사사(兼判義勇巡禁司事)가 되었고, 이듬해 겸충좌시위사상호군(兼忠佐侍衛司上護軍)·겸의흥시위사상호군(兼義興侍衛司上護軍) 등을 역임하였다. 1408년(태종 8) 십사상호군(十司上護軍)이 폐지되면서 겸중군도총제(兼中軍都摠制)가 되었고, 이듬해에 동북면절제사가 되었다. 이어 참찬의정부사·겸지의흥부사(兼知義興府事)를 거쳐, 1412년 말에는 종1품 숭정대부(崇政大夫)로 승진하였다.
1413년(태종 13) 병조판서, 1414년 의정부찬성사가 되었는데, 뒤에 의정부의 직제 개편에 따라 동판의정부사(同判議政府事)·의정부좌참찬·의정부좌찬성을 역임하였다. 1416년(태종 16) 왕이 가뭄을 걱정하고 여러 대신들이 날마다 재앙을 의논하며 몸 둘 바를 모르고 분주하였으나, 이숙번이 병을 이유로 여러 달 궁궐에 나타나지 않았다.
태종은 이숙번이 대궐에 출입하지 않은 이유를 물었고, 때를 같이하여 이숙번의 무례(無禮)와 불충(不忠)을 고하는 상소문이 줄을 이었다. 태종은 이 같은 신하가 있으니 하늘이 어찌 비를 내리겠는가 하며 슬퍼하였다고 한다. 그리고 민무구·민무질 형제[양녕대군의 외숙]의 죽음 이후 세자(世子)[양녕대군]를 자주 뵐 것을 청하는 것은 역모의 마음을 품었기 때문이라는 공격을 받았다. 이에 태종은 이숙번의 희망대로 황해도 연안에 가서 살도록 하였으나, 벌이 가볍다는 반발에 부딪히자 이숙번의 공신녹권과 직첩을 회수하였고, 이어 함양으로 유배지를 옮기도록 조치하였다.
[저술 및 작품]
1414년 지춘추관사로서 영춘추관사 하륜(河崙) 등과 함께 『고려사(高麗史)』 중 공민왕 이후의 사실을 개수(改修)하는 작업에 참여하였다. 세종 조에 『용비어천가』를 편찬할 때 승정원도승지 김돈(金墩)이 선왕 때의 일을 상세히 알고 있다고 천거해 한양에 불려와 편찬을 도왔다.
[묘소]
묘소는 과거에 구로에 속하였으나, 행정구역의 개편으로 현재는 경기도 시흥시 산현동 산71번지[금화로 353]에 위치해 있다. 묘의 형태는 고려 후기와 조선 초기에 유행한 장방형(長方形)이고, 묘역(墓域)은 상·중·하 3단으로 구분되어 있다. 상계에 호석과 상석을 두고, 중계에는 장명등(長明燈)·향로석(香爐石)과 문인석(文人石) 한 쌍을 두었으며, 하계에는 문인석 한 쌍을 더 두었다. 15세기 묘형을 갖춘 문화적 가치를 인정받아 2006년 12월 5일 시흥시 향토유적 제18호로 지정되었다.
[상훈과 추모]
제1·2차 왕자의 난에서 활약하여 정사공신(定社功臣) 2등에 책록된 뒤 안성군(安城君)에 봉해졌고 1400년 태종이 즉위하자 좌명공신 1등이 되었다. 이방원의 즉위를 도운 공으로 공신의 반열에 올랐으며, 1415년 안성부원군(安城府院君)에 봉해졌다. 사후에 영의정으로 추증되었고, 시호는 충숙(忠肅)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