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로수출산업공업단지
-
아침 출근 시간 구로디지털단지역. 사람들이 줄지어 계단을 내려온다. 이 역을 찾는 사람이 하루 14만 명에 이르니 사람도 자동차처럼 모두 줄지어 다닌다. 그래서 출근 시간의 구로동은 활기차다. 한국산업단지공단 은 보도 자료를 통해 지난 2010년 4월 27일자 기준으로 서울디지털산업단지 입주 기업 수가 1만 17개를 기록했다고 발표했다. 또 1만여 기업에 입주한...
-
2010년 현재 남구로역 4번 출구에서 구로3동을 둘러보면 온통 다세대 주택밖에 눈에 들어오지 않는다. 요즘 말로 빌라라고 부르는 건물들인데, 한 건물이 보통 20평[66.12㎡] 남짓한 크기다. 그리 넓지 않은 건물들이지만 대부분 4층에서 5층 정도로 높게 올렸다. 또 하나 특이한 것은 골목이 좁다. 빌라의 건물과 건물은 거의 맞닿아 있어 주차를 위해 배려한 곳이 거의 없다. 각...
-
1970년대 연기를 내뿜는 ‘굴뚝 공장’은 구로공단[정식 명칭은 구로수출산업공업단지]의 대표 이미지에 다름없었다. 1990년대만 하더라도 굴뚝 공장이 남아 있던 구로동은 2010년 현재 구로디지털단지[서울디지털산업단지]로 완벽하게 탈바꿈해 그야말로 상전벽해를 실감케 하는 곳이 되었다. 1960년대 현 구로3동 지역은 영등포에서 시작해 수원으로 가는 국도가 근접해 있었다. 영등포역과...
-
서울특별시 구로구에 거주하고 있는 국제결혼 이주자의 가정. 1964년 구로구에 구로공단이 조성된 이후 산업화 과정에서 여러 나라 사람들이 노동자 신분으로 유입되기 시작하였고, 또한 외국인들이 혼인할 목적으로 한국에 입국하여 구로 지역에 거주하는 등 다양한 양상으로 다문화 가정이 형성되고 있다. 특히 구로수출산업공업단지가 구로동과 가리봉동에 있고, 1970년대 산업화 과정에서 가리봉...
-
구로공단[정식 명칭은 구로수출산업공업단지]은 과거 한국 노동 운동의 최전선이었다. 공장에서는 노조가 만들어졌고, 근무 환경과 처우 개선, 노동자 보호를 위해 분쟁이 빈발하였다. 1970년대 노동 운동이 한창이던 시절에는 대학생들이 위장 취업해서 노동 환경 개선을 위한 활동을 하기도 했다. 그로부터 40년이 지난 2010년 구로동의 모습은 또 다른 산업의 최전선이 되었다....
-
사람들은 서울디지털산업단지의 변화를 ‘천지개벽’이라고 부른다. 굴뚝 공장이 즐비하던 곳에 빌딩형 공장과 고층 빌딩들이 들어섰기 때문이다. 그런데 서울디지털산업단지가 들어서면서 180도 바뀐 구로동과 가산동, 가리봉동만큼이나 공단에서 일하던 노동자들의 이야기는 잊혀져 버렸다. 개발 독재 시대 국가의 공식 호칭은 ‘산업 역군’이었지만 실제로는 공돌이, 공순이로 불렸던 이들의 삶은 어땠...
-
서울특별시 구로구에 분포하고 있는 인문지리적 요소. 인문지리는 지표상에서 인간의 다양한 활동에 의해 형성되는 가시적이거나 비가시적인 경관을 포함하며, 세부적으로는 문화 현상, 경제 현상, 사회 현상, 도시 현상, 인구 현상, 교통 현상 등을 포괄한다. 인문지리에서 주요한 내용으로 다루는 요소는 크게 3가지로 구분할 수 있다. 첫째는 인구 집단의 공간 분석으로서 지표상에 퍼져 있는...
-
1965년 4월 15일 「수출산업공업단지개발조성법」에 의거해 서울특별시 구로구 구로동 지역이 공업 단지 예정지로 지정되었다. 이후 1967년 국내 최초의 공업 단지로 조성된 구로공단은 개발 경제 시대 우리나라 산업화의 요람이었다. 실제로 1,980,000㎡의 드넓은 부지에 수출입국이란 시대적 사명을 띠고 출발한 구로공단은 1960년대 말부터 1980년대 초까지 가발, 봉제, 섬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