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30C03020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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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역 | 서울특별시 구로구 수궁동 |
시대 | 현대/현대 |
집필자 | 이윤정 |
“저 사람은 편히 살았지. 대대로 땅이 있었으니까. 나는 여기서 장사하느라 힘들었어.”
“어허, 무슨 소리야. 저 양반이야말로 수궁동으로 들어와서 돈 많이 벌고 살았지.”
궁동 노인정 앞 평상에서 동갑내기 이근수[1933년생] 씨와 변만식[1933년생] 씨가 40년 막역한 친구 사이임을 증명하듯 술술 대화를 풀어 나간다.
[해방부터 6·25전쟁까지 파란만장한 청소년 시절]
이근수 씨는 전의이씨 26세손이다. 궁동 토박이인 이근수 씨는 “어렸을 때부터 살던 한옥이 아직도 남아 있어. 고조할아버지 때부터 있었다는 한옥이야.”라며 이야기보따리를 풀어놓는다. “여기가 부천이었어. 케이키도 후셍군[경기도 부천군]이었지.”라며 일본말로 설명한다. “초등학교 4학년 때 해방됐어. 그 전까지 부천에 있는 소사북서학교를 다녔어. 일본인과 조선 사람이 같이 다니는 일본 학교였지. 그래서 내가 일본어를 할 줄 알아.”라고 기억을 더듬는다.
이근수 씨는 6·25전쟁이 한창이던 1951년 19세의 나이로 군대에 입대했다.
“한창 전쟁이 치열할 때 집으로 전사 통지서가 도착했대. 이름은 같고 군번이 한끝 차이어서 잘못 온 거지. 그때 부모님이 시체도 못 찾아서 어떻게 하냐고 많이 우셨다나.”
이근수 씨의 군대 이야기에 뒤질세라 변만식 씨도 한 마디 거들었다. “나도 1951년에 입대했어. 이북 출신이어서 미군과 함께 특수 작전에 많이 참여했지. 1957년까지 군대에 있었지 뭐야.”라며 파란만장했던 어린 시절을 떠올린다.
[먹고살기 힘든 시절, 수궁동에서 정착하기까지]
변만식 씨는 제대한 뒤인 1958년에 수궁동에 들어왔다.
수궁동에서 살던 조카에게 땅을 산 게 인연이 됐다. “오류동에서 ‘중앙유리상사’라는 회사를 운영했어. 종업원 다섯 명 두고. 그때만 해도 꽤 잘 됐지.”라며 마을에 정착한 이야기를 풀어놓는다.
그러자 이근수 씨가 “나는 이 양반이 유리 장사할 때 연탄 직매를 했잖아. 나무 해다 아궁이에 불 때던 걸 1950~1960년대에 모두 연탄보일러로 바꿨거든. 그때 연탄 한 장에 1원씩 팔았지.”라고 말한다. 그러면서 “종업원 세 명인 회사였는데 난 일이 힘들어서 이렇게 골병들고 변만식 씨는 저렇게 정정하잖아.”라며 농을 섞는다.
이근수 씨 말이 끝나기 무섭게 변만식 씨가 말을 가로 챈다 “1980년대에 우리 마을에도 아파트가 들어온다고 했었어. 그런데 여기 집성촌 사람들이 반대하는 진정서를 서울시에 올렸어. 아파트 들어오면 마을 망친다고…….” 그러자 이근수 씨가 “그래서 아파트 대신 연립 주택, 빌라가 들어온 거야. 바로 앞에 있는 저 빌라 자리가 모두 논밭이야. 궁동길이 오류천이었고. 옛날엔 천에서 팔뚝만한 가재도 잡혔는걸.”라고 말을 이었다.
수궁동 토박이인 이근수 씨와 이북에서 내려와 수궁동에 정착한 변만식 씨가 앞서거니 뒤서거니 옛이야기에 열중하는 모습에서도 알 수 있듯 이젠 둘도 없는 친구가 됐다. “집성촌이니까 텃세가 있을 법도 한데, 사람들이 좋아 여태껏 여기서 살고 있지.”라는 변만식 씨의 말에 이근수 씨가 말을 이었다. “친구, 오늘도 반주 한잔 하러 가세.” 그리고 두 사람은 사이좋게 어깨동무를 하고 노인정을 나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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