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30B03020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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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역 | 서울특별시 구로구 가리봉동 |
시대 | 현대/현대 |
집필자 | 이다일 |
가리봉동 취재가 한창이던 때는 2010년 5월, 마침 6·10지방 선거를 앞두고 있어서 거리에는 홍보 전단이 가득했고 만나는 사람마다 빠지지 않고 선거 이야기를 했다. 유흥열[1945년생] 씨를 만날 때도 그랬다. 유흥열 씨는 구청장 후보 명함을 내밀며 자기소개를 했다. 지금은 모 정당의 홍보를 맡아서 하고 있으며 40년 동안 가리봉동에서 살았으니 여기가 고향이나 마찬가지라고 했다.
[고향 땅 팔아 차린 가리봉동 정읍식당]
유흥열 씨의 고향은 전라북도 고창이다. 고향에서 부모님으로 부터 물려받은 땅에서 농사를 지으며 살았다. 그러다가 전농동에서 학원을 하는 동생의 권유로 서울로 올라왔다. 아이들은 서울에서 살면서 교육에 신경 써 보겠다는 생각에서였다.
그런데 농사만 짓던 사람이 서울에 올라오자 무슨 일을 해야 할지가 제일 걱정이었다. 그때가 1978년, 서울 가리봉동이 공장이 많이 들어서면서 장사가 잘 된다는 얘기를 듣고 별다른 기술이 없던 부부는 이곳에 자리를 잡았다. 서울에 먼저 자리 잡고 살다가 유흥열 씨를 서울로 부른 동생은 “여기는 야채 장사가 잘 되고 좋은데 새벽에 일어나고 고생해야 해요. 대신 식당을 하면 좀 편하고 괜찮을 꺼예요.”라고 식당을 추천했다.
그래서 가리봉시장에 ‘정읍식당’ 이름으로 식당을 차렸다.
왜 이름이 정읍식당이었느냐는 질문에 유흥열 씨는 “사람들이 고창을 잘 모르더라구. 그래도 정읍은 많이 아니까 정읍식당이라 했제.”라고 답했다. 시골에서 전답을 팔아 온 돈으로 만든 식당은 튀김과 분식을 하는 가게였다. 1000만 원을 주고 자리 잡은 곳도 무허가 건물이었다. “처음 여기 시장에 오니까 건물이 여덟 채가 있더라고. 거기 들어왔지. 수도도 없고 전기도 없는데 들어온 거야. 그런데 식당을 하려니까 수도, 전기 없이 할 수가 있나. 내가 펌프를 몰래 박아서 썼어. 그때 몰래 쓰다가 걸리면 벌금이 100만 원이라고 했는데 어쩔 수 있나. 30년도 더 지났으니까 지금 와서 고백하는 거야.”
[가리봉시장 전성기]
유흥열 씨는 식당을 하면서 2남 2녀를 키워 냈다. 지금은 모두 장성해서 시집, 장가갔고 막내아들만 같이 살고 있다. 정읍식당에서 ‘진미식당’으로 이름을 바꾸고 운영하던 식당은 현재 운영하지 않는다.
“이제 나이 먹어서 그냥 동네서 왔다 갔다 하면서 살아요. 30년 넘게 살았더니 내가 이 동네 토박이가 된 거지.”라며 유흥열 씨는 말한다.
유흥열 씨가 식당을 했던 1970년대 후반부터 1990년대까지 가리봉동은 최고의 전성기였다. 각종 공장들이 들어섰고 수출 산업은 꾸준히 발전해 경기가 좋았다. 주말이면 가리봉시장 골목은 발 디딜 틈 없이 사람들로 가득했다.
“주말이면 명동거리보다 아마 여기가 더 사람이 많았을 거야. 그땐 장사하느라 정신없었어. 여름이면 팥빙수 팔아야지, 겨울이면 뜨끈한 국물에 칼국수 팔아야지.”
유흥열 씨는 가리봉시장의 호황은 이제 옛말이라며 씁쓸한 말을 이어 갔다.
“지금은 예전 같지 않아. 여기서 계속 장사하다가는 쫄딱 망할지도 모르지. 특히 식당은 중국 사람들이 많이 하고 있어. 거리에 다니는 사람들 대부분이 중국 사람들이니 그 사람들 입맛에 맞게 음식을 팔아야 하거든.”
가리봉시장에서 성공한 사람들은 인근에 집이나 가게를 샀다. 그 터에서 자리를 잡고 살고 있다. 유흥열 씨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가리봉동 바로 옆의 구로3동에 연립 주택을 사 뒀다. 옆에서 말을 거든 이완기[1952년생] 씨가 “이 양반이 그래도 여기서 장사해서 실속 잘 챙겼지. 연립 주택도 여러 채 사서 지금은 세받아서 살고 있다니깐. 그렇게 잘 챙겨 둔 사람 아니면 여기 시장에서 지금은 먹고살기 힘들어.”라고 거들었다.
이제 진미식당은 가리봉시장에서 볼 수 없다. 대신 그 거리에는 중국 사람들이 운영하는 중국 음식 식당들이 자리를 채우고 있다.
[정보제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