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30A02020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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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역 | 서울특별시 구로구 구로동 |
시대 | 현대/현대 |
집필자 | 이다일 |
2010년, 구로구 구로3동은 고층 빌딩과 아파트로 이뤄진 삭막한 회색 도시다. 이런 곳에서 1961년에 지어진 공영 주택 600동과 간이 주택 275동, 1962년에 지어진 공익 주택 275동에 대한 이야기를 찾는 일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닐 듯싶었다. 그런데 사람들을 만나는 과정에서 의외의 일이 벌어졌다. 공영 주택과 간이 주택이 그리 오래된 일이 아니라는 사람들의 증언이 나왔는데, 지난 2006년 완공되어 가장 최근에 지어진 두산아파트가 바로 공영 주택과 간이 주택을 재개발한 곳이라는 이야기였다.
두산아파트 공사가 지난 2002년부터 시작됐으니 2002년까지는 사람들이 1960년대 초반에 지어진 주택에서 그대로 살았다는 얘기다.
두산아파트의 재개발사가 바로 구로동 공익 주택의 재개발사라고 말해도 될 만큼 밀접했기에 필자는 두산아파트 재개발을 추진했던 주민자치위원장 이인엽[1955년생] 씨를 만나보기로 했다.
[한 지붕 열두 가구]
이인엽 씨에 따르면, 구로3동 지역에는 1961년 11월 20일부터 1962년까지 공영 주택과 간이 주택들이 생겨났다고 한다.
당시는 서울 청계천 등 도심 지역을 정비하던 때였다. 새로 길을 닦고 도시를 정비하느라 6·25전쟁 이후 우후죽순으로 들어선 판잣집을 정리했던 것이다. 지금의 구로3동 지역에 형성된 간이 주택에는 주로 청계천 지역에서 이주한 사람들이 자리를 잡았다. 당시 정부에서는 함석지붕을 대고 흙으로 벽을 쌓은 집을 지어 줬다. 20여 평[약 66.12㎡] 남짓하던 한 채의 집에 벽을 칸칸이 나눠 열두 가구를 이주시켰다.
이런 집들이 구로3동 지역에 빼곡하게 들어섰다. 초창기에는 전기와 수도가 없었다. 물론 화장실도 없었다. 구로3동 전 지역을 통틀어 공동 화장실이 6개에 불과했다. 1970년대가 되어도 별반 다를 것이 없었다. 물은 공동 우물에서 길어 와야 했고 화장실은 조금 늘어나 10여 개가 됐다.
이인엽 씨는 그래도 1970년대가 구로동 간이 주택에서 제일 살기 좋았던 시절이라고 회상했다. “좁은 집이었지. 문 열면 앞집이 뭐하는지도 다 보이고, 벽을 툭툭 치고 ‘이리 와서 술 한잔해.’라고 부르기도 했지. 그래서 골목에 누가 결혼하고, 누가 돌아가시면 다들 내일처럼 도와주고 같이 기뻐하고 슬퍼했어.”
하지만 세월이 지나면서 구로3동 주택가의 모습도 변하기 시작했다. 한 지붕 아래 열두 가구씩 거주했던 집들도 떠나는 집, 합쳐지는 집 등등 여러 가지로 변했다. 이사 간 자리엔 어디선가 이사를 왔다. 당시 열악한 환경과 좁은 집이라 저렴하게 거래됐던 곳이다. 그래서인지 서울 어디선가 사업을 하다 실패했다는 사람, 혹은 알코올 중독에 빠져 전 재산을 탕진한 사람, 빚쟁이를 피해서 도망 온 사람 등 독특한 사연을 가진 사람들이 많이 들어왔다고 한다.
[변화하는 공영 주택과 간이 주택]
결국 한 지붕에 열두 칸이던 집이 서로 합쳐지기를 반복하면서 여러 채를 터서 사용하는 사람도 나타났다. 하지만 1970년대 대부분의 주택들은 옆으로 확장하지는 못하고 지붕 위에 기둥을 세우고 2층으로 확장을 했다. 확장의 사유는 다양했다. 아이들이 자라서 공간이 모자라는 경우도 있었고, 당시 구로공단의 공장 기숙사가 부족하니, 한 층을 더 올려서 세를 주는 경우도 많았다.
좁은 집을 위로 올리려니 특이한 광경이 펼쳐졌다. 방 안 천장에 구멍을 뚫어 천장 문을 내리면 사다리가 됐다. 그 위로 올라가면 2층 방이다. 집 안에 사다리를 놓지 못하는 사람들은 집 밖에 사다리를 놨다. 나무 사다리도 많았고 좀 더 튼튼하게는 철제 사다리를 만들어 놓기도 했다.
2002년 철거 직전의 주택은 골목이 좁았다. 사람이 우산을 쓰고 다니지 못할 만큼 좁았다. 어찌하여 이렇게 좁은 골목을 만들었을까?, 좀 더 넓게 공간을 갖고 지어야 하는 것이 아니었을까? 하는 의문이 들 때 이인엽 씨에게 들은 답변은 의외였다.
앞에서도 기술했듯이, 1960년대 초에 만들어진 주택이 워낙 좁다 보니 사람들이 집을 골목 쪽으로 늘렸다는 것이다. 벽을 터서 조금 밖으로 넓히면서 주방을 만들었고, 대문을 터서 밖으로 넓히면서 거실이 됐다는 것. 오른쪽 집, 왼쪽 집, 모두 같이 집을 늘려 대니 자연스럽게 골목이 좁아질 수밖에 없었다. 결국 그렇게 30년이 흐르면서 어른 한 명 지나기조차 좁은 골목이 만들어졌고, 2층인지 3층인지 밖에선 구분할 수도 없는 주택들이 자리 잡게 되었던 것이다.
[6천 평[1만 9834.71㎡] 주택가에 화장실이 열두 개]
지금의 남구로역 4번 출구에서 1번 출구 사이, 한신아파트 자리에서 구로남초등학교까지의 자리 대부분에 공영 주택과 간이 주택이 자리 잡고 있었다.
면적으로는 약 6천 평[약 1만 9834.71㎡]에 달했다. 놀라운 것은 여기에 화장실이 고작 열두 개밖에 없었다는 것. 아침 일과가 바빴던 동네 사람들은 아침 밥상에서 숟가락 놓기 무섭게 화장실 앞에서 줄을 서야 했다. 워낙 경쟁이 치열했다. 많은 사람이 몇 안 되는 화장실을 써야 하니 당연한 결과였다. 그래도 전기와 수도는 1970년대에 들어왔다. 마을의 공동 수도는 유료로 운영되기도 했는데, 초창기엔 물 한 번 떠 가는데 얼마씩 돈을 내기도 했다.
또한 좁은 골목의 복잡한 동네에 화장실마저 공동으로 쓰고 있으니 화장실 주변은 우범 지역이기도 했다. 이인엽 씨에 따르면, 1970~1980년대 공동 화장실 주변에선 성범죄가 자주 일어났다고 한다. 당시 성범죄 피해자는 어디 가서 말 한 마디 제대로 못할 만큼, 피해를 입은 그 사실 자체가 부끄럽고 수치스런 일로 치부되었다. 이 때문에 성범죄 피해를 당한 가족들은 “사유는 말하기 어렵고 급하게 이사 간다.”는 얘기만 남기고 조용히 떠나기도 했다. 여자아이를 가진 부모들은 아이가 밤에 화장실에 간다고 하면 같이 따라 나서는 게 일과였다.
그때의 주택들이 2002년 대한민국에서 월드컵이 열릴 때까지 그 모습 그대로 남아 있었다. 가장 큰 주택 밀집 지역의 경우 2002년 두산아파트로 재개발되면서 지금은 거의 없어졌지만, 아직도 남구로역 4번 출구 언덕 밑에는 두세 동의 공영 주택이 남아 있다. 또 빌라촌이 되어 버린 구로3동 안에도 아직 재개발하지 않은 단층의 공영 주택 일부가 남아 있다. 심지어 화장실이 없는 집을 위해 공동 화장실이 아직도 빌라촌 한가운데에 남아 있기도 하다.
[정보제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