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30A02010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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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역 | 서울특별시 구로구 구로동 |
시대 | 현대/현대 |
집필자 | 이윤정 |
사람들은 서울디지털산업단지의 변화를 ‘천지개벽’이라고 부른다. 굴뚝 공장이 즐비하던 곳에 빌딩형 공장과 고층 빌딩들이 들어섰기 때문이다. 그런데 서울디지털산업단지가 들어서면서 180도 바뀐 구로동과 가산동, 가리봉동만큼이나 공단에서 일하던 노동자들의 이야기는 잊혀져 버렸다. 개발 독재 시대 국가의 공식 호칭은 ‘산업 역군’이었지만 실제로는 공돌이, 공순이로 불렸던 이들의 삶은 어땠을까.
[한 지붕 열 가족, 근로자들이 사는 집]
1970~1980년대 구로공단[정식 명칭은 구로수출산업공업단지]에서 일했던 대부분의 노동자들은 서울의 환상을 좇거나 남자 형제의 학비를 벌기 위해 상경한 십대 여성들이었다. 이들에게 공단은 고된 삶의 터전이었다. 구로공단 노동자로 일했던 배옥경[가명, 1965년생] 씨는 “오랜 기숙사 생활을 하며 하루 18시간씩 작업을 했다.”고 말했다. 당시 노동자들은 공장에서 비인간적인 대우를 받는 경우가 비일비재했다. 복지 혜택 또한 꿈도 못 꾸던 시절이었다.
전라북도 정읍에서 나고 자란 작가 신경숙 씨는 1970년대 말 상경해 구로공단에서 일하면서 저녁에는 영등포여자고등학교에서 운영하는 산업체특별학급에 다녔다. 그의 잠자리는 가리봉동의 속칭 ‘벌집촌’이었다. 신경숙 작가의 체험은 소설 『외딴방』에 그대로 녹아 있다.
소설 『외딴방』에서는 당시 벌집을 이렇게 묘사하고 있다. “서른일곱 개의 방이 있던 그 집, 미로 속에 놓인 방들, 계단을 타고 구불구불 들어가 이젠 더 어쩔 수 없을 것 같은 곳에 작은 부엌이 딸린 방이 또 있던 3층 붉은 벽돌집.”
실제 구로동과 가리봉동 일대에 퍼져 있던 벌집은 외관상으로는 단독 주택이지만 호당 10~30세대가 거주할 수 있는 독특한 내부 구조를 띠고 있었다. ‘벌집’이란 이름도 이런 작은 쪽방들이 다닥다닥 붙어 있다고 해서 붙여졌다.
2010년 현재 가리봉동 일대에 남은 쪽방을 가 보면 당시 노동자들의 삶을 짐작해 볼 수 있다. 문을 열고 들어서면 바로 부엌이 나오고 1~2평[3.3~6.6㎡] 남짓한 방이 주거 공간이다. 현재 가리봉동 벌집에는 구로공단에서 일하던 노동자 대신 조선족이나 중국인이 들어와 살고 있다.
[노동자 의식 성장은 노동 운동과 노동 쟁의로 이어지고……]
1970~1980년대 노동자 중 일부는 대학 학력을 숨기고 공장에 위장 취업하기도 했다. 이들은 노동자들 사이에서 ‘학삐리’로 통했다. 이들을 주축으로 노동자로서 정당한 대우를 받고자 하는 움직임이 일었다. 의식이 높아진 노동자들은 열악한 업무 환경과 낙후된 주거 환경에 대해 돌아보기 시작했다.
1980년대 들어 노동 운동에 대한 통제가 약해지자 노동 운동은 다시 활발해지기 시작했다. 저임금과 장시간 노동에 시달려 온 노동자들의 저항도 한꺼번에 분출되기 시작했다. 이후 1985년에는 구로공단 동맹 파업으로 발전했다.
“자꾸 공순이, 공순이, 캐쌓지 말어예. 어디 뭐 대학생이 씨가 따로 있어예? 우리도 눈·코 있고 귀 있고 입 있어예. 뭐시 굽었고 뭐시 바른동 분간할 줄 알고, 어디가 섞는지 어디가 뭉개[무너]지는지 냄새 맡고 소리 들어예. 그런데 입는 입 가지고 와 말 못 하겠어예?”라고 이문열이 1987년에 쓴 소설 『구로아리랑』의 여주인공 말처럼, 구로공단의 노동 운동은 노동자들의 삶을 보장받기 위한 최소한의 몸부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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