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30A01020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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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역 | 서울특별시 구로구 구로동 |
시대 | 현대/현대 |
집필자 | 이다일 |
1940년대에 박명재[1932년생] 씨는 구로동 지역에서 십대를 보냈다. 일제 강점기, 구로와 가리봉의 경계가 뚜렷하지 않았던 시절이기도 했다. 좀 더 정확히 말하면 구로동이 시흥군 북면에 속해 있었을 때의 이야기다.
박명재 씨는 시흥에 있는 학교를 다니기 위해 요즘 말로 하면 ‘과외’를 받았다. 집으로 선생님이 찾아오는 과외가 아니라 마을에 있는 가리봉교회에서 만든 ‘양명강습소’를 통해서였다. 양명강습소에는 마을 사람들이 쌀과 돈을 모아서 모셔 온 선생님이 있었다.
[무 서리하던 등하굣길]
구로동 인근에서 제대로 된 학교는 시흥에 있었다. 걸어서 십리나 되는 길이었다. 시흥국민학교를 들어가는 것도 쉬운 일은 아니었다. 한국 학생과 일본 학생들이 섞여서 공부하던 시절로, 일종의 입학시험을 치러야 들어갈 수 있었다. 박명재 씨는 입학시험을 위해 마침 동네에 있던 양명강습소를 다녔다. 덕분에 한 번에 제 나이에 맞춰 입학할 수 있었다. 하지만 다른 아이들은 그렇지 못했다. 국민학교를 들어가기 위해 재수, 삼수까지 했다. 그러니 수업이 끝나고 같이 뛰어놀다 통성명을 하다 보면 박명재 씨보다 나이가 두세 살까지 많은 경우가 허다했다.
박명재 씨가 1940년대 구로동을 누빈 건 등하교를 위해서였다. 학교에서 돌아오는 하굣길. 배도 고프고 장난도 치고 싶었다. 어느 날, 박명재 씨와 함께 구로동에 있는 집을 향해 돌아오던 친구가 밭에 들어가 무를 뽑아 먹자고 했다. 아무도 보는 사람이 없는 것 같아 두 사람은 책가방을 한쪽에 모아 두고 밭으로 들어갔다. 친구가 앞장섰다. 그런데 뒤따르던 박명재 씨는 깜짝 놀랐다. 매일 무가 뽑혀 나가는 것을 수상하게 생각한 밭주인이 몰래 숨어 있었던 것이다. 밭주인은 까만 교복을 입은 아이들을 주시해서 보고 있었다. 앞장섰던 친구는 주인의 손에 잡혔다. 박명재 씨는 ‘에라, 모르겠다’ 하고는 2인분 책가방을 메고 냅다 집으로 뛰었다.
박명재 씨의 집안은 그리 넉넉하다고 할 수는 없어도 먹고사는 데 지장은 없었다. 당시 구로동 지역은 농사짓기 꽤 괜찮은 지역이라 인심도 나쁘지 않았다. 곳간이 비어 있지 않을 정도니 서로서로 나누며 돕고 살았다.
어쨌든 당시 친구는 무서리를 하다 걸렸지만 박명재 씨는 무사히 집으로 돌아왔다. 하지만 마음이 편하지 않아 자백하러 갔고, 결국 아버지한테 된통 혼난 기억이 팔순을 앞 둔 지금까지 생생하다.
[우마차 타고 다니던 영등포시장]
1940년대 당시 지금의 구로동에 살던 사람들은 대부분 농부였다. 몇몇 사람들은 복숭아 과수원을 했다. 주로 일본 사람들이었다. 그러다 해방이 되고 일본 사람들이 썰물같이 빠져 나가자 그 자리를 한국 사람들이 채우고 농사를 지었다. 인천과 서울을 잇는 철도가 있던 영등포는 인근 지역에서 농사지은 작물을 거래하던 시장이었다.
구로동에서도 영등포로 장을 보러 나갔다. 농사꾼들이니 말 대신 소를 탔다. 짐을 싣기도 편하고 논일을 할 때나 밭일할 때는 말보다 소가 더 실용적이었다. 그때는 영등포 장터에 다녀오는 것이 유일한 경제 활동이었다. 한 번 나갔다 들어올 때마다 돈이 생겼기에 다른 무엇보다 중요한 일이었다.
박명재 씨의 아버지도 그랬지만, 시장에 다녀오는 데는 항상 소소한 문제가 뒤따랐다. 바로 술이었다. 우마차로 꼬불꼬불 십 리를 가야 하는 길인데, 갈 때는 아침 맑은 정신에 일찍 출발하니까 문제가 없었다. 그런데 올 때가 문제다. 가져간 쌀이며 보리 따위의 농작물을 모두 팔아 주머니가 두둑하니 기분이 좋다. 시장에서 자연스럽게 탁주 한 잔 걸치게 된다. 오래 만에 만난 인근 동네 사람들과도 술 한 잔 기울인다. 그러다 보면 해가 산 너머로 넘어가는 것이다.
언제인가, 집에서 기다리다 지친 어머니는 어린 박명재 씨를 장으로 보냈다. “아버지를 찾아오라.”는 특명이었다. 몇 살이었는지 기억하지 못하지만 박명재 씨는, “전쟁이 나기 전이고 해방된 후니까 아마 1940년대 후반일 꺼야.”라며 말을 이었다. 장에서 찾아 낸 아버지는 어머니의 예상대로 약주를 많이 한 상태였고, 그 덕에 박명재 씨는 ‘우마차 대리 운전'을 했다고 한다.
박명재 씨는 1940년대까지 구로동은 여느 농촌과 다를 것이 없었다고 말한다. 1950년대는 전쟁과 재건으로 농사를 거르는 때도 많았고, 1960년부터 산업화가 시작되면서 농사를 짓던 땅에 하나둘 공장들이 들어서기 시작했다. 그래서 구로동의 옛 모습은 이제 팔순 노인의 기억에만 남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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