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300167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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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야 | 생활·민속/민속 |
유형 | 개념 용어/개념 용어(기획) |
지역 | 서울특별시 구로구 |
시대 | 현대/현대 |
집필자 | 변남섭 |
[개설]
수궁동 도당제는 마을의 농악, 무속의 굿, 유교식 제의가 결합된 독특한 마을 제의이다. 마을을 맑게 하고, 평안을 기원하며, 복을 도모함으로써 결국 억눌렸던 삶에 활기를 넣어 주는 크나큰 축제이다. 수궁동에서는 50년 전까지만 해도 매년 도당제가 열렸다고 한다. 수궁동 도당제의 유래에 대한 확실한 문헌 자료는 없으나 구전에 따르면 고려 말에 서해로부터 외적의 침입이 빈번할 당시 마을의 평화와 국태민안을 기원하기 위한 범 동민적인 행사로 시작되었다고 한다. 특히 이곳은 안동권씨의 집성촌이므로 그들이 주축이 되어 성대하게 벌어졌다고 한다. 이는 경기도 부천시 중동 덕수장씨의 집성촌인 장말에서 매년 음력 10월 10일에 벌어지는 도당굿과 비교해 볼 수 있다. 장말 도당굿은 부천시의 지원을 받아 국가무형문화재 제98호 경기도 도당굿보존회에서 맡아서 완전한 무속굿의 형태로 이루어지고 있다.
[수궁동과 안동권씨]
서울특별시 구로구 수궁동은 자연경관이 수려하여 예로부터 유서 깊은 고장으로 조선 선조대왕의 7녀인 정선옹주(貞善翁主)의 묘, 유진오 별장 터, 전통 사찰이 여섯 곳, 궁동저수지, 약수터 다섯 군데 등 명소와 휴식 공간이 곳곳에 위치하고 있다. 수궁동은 온수동의 ‘수’자와 궁동의 ‘궁’자를 조합하여 행정동명을 ‘수궁’이라 하였다.
행정상의 변화를 살펴보면, 1949년 이전에는 경기도 부천군 소사읍 오류리에 속하였다. 이후 1963년 오류출장소로 편입되면서 ‘동’으로 명칭이 변경되었고, 1968년에는 오류출장소가 폐지되어 영등포구로 편입되었다. 1970년 오류동사무소에서 오류동, 천왕동, 온수동, 궁동, 항동까지 관할하다가 1980년 구로구가 신설되면서 구로구로 편입이 되었고, 1988년 7월 1일 수궁동이 신설되었다. 현재는 수궁동사무소에서 온수동, 궁동, 항동까지 관할하고 있다.
이곳의 진산(鎭山)은 표고 114m의 와룡산으로 부천시 작동과 경계를 이룬다. 이 산과 그 좌우로 뻗어 있는 산등성이가 마치 용이 웅크리고 누워 있는 형국이라고 하여 와룡산이라고 하는데, 그 중간쯤인 궁동의 산을 ‘용의 허리’라고 한다. 구로구와 양천구 및 경기도 부천시의 경계를 이루고 있는 표고 80~120m 가량의 봉우리들은 한남정맥의 한 줄기인 수원의 광교산과 백운산, 안산의 수리산, 인천의 소래산 지맥을 따라 부천 원미산에서 온수동 큰산과 궁동의 와룡산으로 이어지는 잔구성(殘丘性) 산지이다.
풍수지리상으로 보면 와룡산의 동쪽 등성이가 좌청룡(左靑龍)으로 표고 108m의 청룡산과 그 능선으로 이루어져 있다. 서쪽 등성이는 우백호(右白虎)가 되는데 104m 봉우리에서 원각사를 안고 내려온 능선이 88.5m와 90.5m 봉우리를 만들어 내백호(內白虎)를 이루고, 104m 봉우리에서 더 남하하여 103m 봉우리에서 내려온 95.5m의 도당산과 78.5m의 두리봉이 외백호(外白虎)가 된다.
마을 복판에 있는 궁동저수지[낚시터]까지 북쪽 산기슭에서 논 가운데로 길게 뻗은 산 1-6번지의 언덕이 곧 명당 혈(穴)이다. 이곳에 선조의 일곱째 딸인 정선옹주와 부마인 길성군(吉成君) 권대임(權大任)[1595~1645]을 비롯하여 안동권씨 일가 8기의 무덤이 있다. 아울러 궁동이란 지명도 선조가 정선옹주에게 이 일대를 사패지(賜牌地)로 내려 주면서 비롯되었다.
이후 궁골의 서쪽에는 안동권씨 일가가 현재까지 거주해 오고 있다. 정선옹주의 시아버지, 즉 부마인 권대임의 아버지는 권협(權悏)이라는 사람으로 이곳에 터를 잡았는데, 권협은 조선 중기의 문신으로 본관은 안동(安東)이고 『명종실록』 편찬에 참여한 인물이다. 1577년(선조 10)에 알성문과에 을과로 급제하여 승문원·춘추관의 벼슬을 거쳐 1589년(선조 22)에 홍문관수찬으로서 전국에 괴질이 돌자 함경도에 파견되어 치제(致祭)하였다. 1607년(선조 40)에 예조판서가 되었는데, 광해군 때 홍문관의 탄핵을 받아 관직을 버리고 두문불출하였다. 시호는 충정(忠貞)이다.
그의 아들인 권대임은 조선 중기의 서예가로 글씨를 잘 써서 선조의 총애를 받았다. 1702년 형조정랑에 올라 춘추관기주관(春秋館記注官)이 되었고 이어 만경(萬頃), 보령(保寧) 현감이 되어 선정을 베풀었다. 서문유(徐文裕), 황석래(黃石來), 정필시(鄭弼時), 김석구(金錫龜) 등과의 서신 왕래 내용이 문집 4권 2책에 전한다. 현재 수궁동의 주민자치위원장을 하고 있는 16대손 권창호를 비롯하여 17대손까지 살고 있다.
[수궁동의 도당(都堂)]
선조의 7녀인 정선옹주의 묘역을 중심으로 좌우에 두 능선이 펼쳐져 있는데, 그 왼편 능선의 끝자락에 도당제고개가 있다. 그 고개의 가장 높은 곳에 제를 지내던 당이 있었는데, 현재는 당이 있던 자리에 세종과학고등학교가 들어서 있다. 그래서 그곳에 도당을 다시 세우기는 어려운 상황이 되었다. 이런 이유로 수궁동의 주민자치위원장을 맡은 16대손 권창호는 도당을 정선옹주의 묘역에 조성된 생태공원으로 옮기고자 하고 있다.
생태공원은 원래 1960년대까지 장승이 지켰고, 상여 등 장례물품을 보관하던 상여집이 있던 곳이었다. 우선 장승을 다시 세워 도당의 역할을 대신하게 하고, 그곳에서 마을 사람들이 모여 제를 지내고자 하는 것이다. 이것은 원래의 도당 터를 되찾기 어려운 상황에서 500여 년을 지켜온 토박이인 안동권씨의 묘역을 중심으로 도당제를 되살리자는 현실적인 의도라고 할 수 있다.
[도당제(都堂祭)]
도당은 한 집안을 위한 당이 아니라 마을을 단위로 한 당을 이른다. 그러므로 도당제는 한 마을 주민들이 그 마을의 평안과 행복을 기원하기 위해 일정한 시기에 공동으로 행하는 일련의 행위라고 할 수 있다. 이러한 도당제는 서울과 경기도를 중심으로 살펴보면 유교식 제의만을 위주로 한 형태가 있고, 도당굿 등의 이름으로 무속식 굿의 형태를 갖추기도 하며, 또는 유교식과 무속식이 섞여 있는 모습으로도 나타난다.
1. 과거의 도당제
과거에는 정월 대보름날을 기준으로 하는데, 정초에 많게는 열흘 정도 지신밟기를 하고 보름날 굿을 시작으로 도당제를 진행하였다. 도당제는 순서상 지신밟기 - 굿 - 제 - 농악놀이 순으로 이루어졌다.
첫째, 지신밟기는 농기를 앞세우고 장구, 징, 북, 꽹가리, 소고 등의 악기를 치며 쌀과 북어가 차려진 상을 든다. 이 행렬은 마을의 경계를 표시한 장승이 세워진 곳이나 서낭과 공동의 우물 등 주요한 곳과 각 가정을 다니며 나쁜 것들을 물리치고 복을 빌고 축원하는 의식을 한다. 이런 형태의 의식은 곳에 따라서 ‘유가’, ‘돌돌이’라고도 불린다. 지신밟기는 본격적인 제의라기보다는 마을 전체와 각 가정의 깨끗하지 못한 것들을 씻어내고 좋은 복이 들어올 준비를 하는 절차라고 할 수 있다.
둘째, 굿은 무속식 굿을 이르는 말로 이곳에서는 남자 무당이 진산인 와룡산의 산신을 청배[신을 불러 모시는 절차]하는 것을 시작으로 1시간 정도로 짧게 진행하였다. 흔히 박수라고 하는 남자 무당이 왔다는 것은 당시에만 그러했을 가능성과 이 지역의 단골무당이 박수였을 가능성, 또는 한수 이남의 화랭이 또는 산이라는 남무 집단이 도맡았을 세 가지의 가능성을 들 수 있다.
‘남자 무당’이라는 증언에 근거하여 확대한다면 꼭 남자였다는 말로도 바꿀 수 있다. 그러면 첫 번째 가능성은 희박해진다고 할 수 있다. 그렇다면 박수무당이 이곳의 단골이었느냐 화랭이들의 단골판이었느냐 두 가지의 가능성이 남는다. 보통 의식적인 부분은 무녀인 여자 무당이 담당하고 남자들은 무녀의 춤과 노래를 반주하는 역할을 한다. 그러나 한수 이남의 화랭이들은 신을 청배하거나 마을과 각 가정을 도는 돌돌이, 손님과 군웅님의 오정기, 사방의 부정을 물리치는 터벌림춤, 뒷전 거리, 집안을 위한 성주거리 등을 도맡아 했다. 때문에 한수 이남에 해당하는 수궁동에서 화랭이 집단이 이 지역을 단골판으로 삼아 지신밟기에 이어진 굿을 진행하였을 가능성이 높다.
셋째, 이어지는 제는 유교식 제의를 의미한다. 제관, 축관, 좌우 집사가 진행을 하고 돼지를 통째로 바치며 여러 가지 떡을 올렸다. 수원 고색동의 예를 들면, 농악대들이 먼저 지신밟기와 유사한 돌돌이를 하고 나면 마을에서 선발된 제관, 축관 등이 유교식 제의를 한다. 이 때 제와 굿은 완전히 분리되어 있다. 전통적인 굿 의식에 유교식 제의가 어떠한 필요에 의해 결합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미루어 보면 수궁동의 굿과 제 또한 서로 영역과 역할을 별도로 하였을 것이라고 짐작된다.
넷째, 농악놀이로써 악기를 치면서 흥겹게 노는 판이 마지막을 이루었다. 특별한 의식 행위나 형식을 갖추지 않고 자유롭고 신나게 먹고 마시면서 춤을 추고 노래도 부르는 자리, 누구나 자신의 신명을 마음껏 풀어내며 하나가 되는 대동의 한판이 마지막을 장식하였을 것이다. 신에게 술과 음식을 정성껏 바치지만 결국 모두가 나누어 먹는 충전의 음식이 되고, 고된 일에 시달린 피로를 씻고, 응어리진 마음을 개운하게 날려 버리는 순간이 분명하였을 것이다.
비록 증언에 따른 모습이지만 형태면에서 농악과 무속 굿과 유교식 제의가 합쳐진 다양한 모습임을 알 수 있다. 세 가지가 질서 정연하게 진행이 되는데 농악대가 마을의 경계와 집안을 돌아 온 마을을 깨끗하게 해 놓으면 이 마을의 산신을 모셔 대우하고, 유교식 제의를 통해 조상들을 대접하고 나면 다음으로 모두가 신나게 노는 순서로 되어 있다.
2. 현재의 도당제
2000년대 초반에 권창호 주민자치위원장을 중심으로 도당제의 복원을 시도하였다. 서울시에서 개최한 민속 축제에 참가하게 되었던 것이다. 예전의 모습에는 상당히 미치지 못하였지만 3일에 걸친 지신밟기와 유교식 제의, 농악놀이를 재현하였다. 아쉽지만 복원의 첫발을 내딛는데 만족하고 동 대항에서 멈추어야만 했다. 도당제를 지냈던 도당은 그 흔적도 없고, 너무 오랜 세월동안 단절이 되었기 때문에 짧은 기간 동안 복원하는 것이 결코 쉬운 일은 아니다. 그러나 멈추지 않고 전통을 살려 비록 10여 집이지만 지신밟기를 하고 거리 행진으로 도당제의 존재를 알리며, 그 기운을 척사대회로 끌고 가서 그 의미를 대신하고 있다.
3. 복원되는 수궁동 도당제
권창호는 관의 도움을 받아 정선옹주의 묘역에 장승을 세우고 도당제를 재현할 준비를 하였다. 그러나 마을의 평안과 화합을 위한 의미를 특정한 종교 행위로 간주하는 사람들의 잘못된 인식으로 그때까지의 노력은 다시 원점으로 돌아가고 말았다.
그는 마을을 사랑하고 지나온 세월을 존중한다. 자신의 이익을 최우선으로 하고 근본을 찾기 보다는 그저 유행을 따라가는 현 세태와는 분명 다르다. 마을 만들기 사업의 일환으로 동사무소의 2, 3층을 마을 회관으로 활용하여 고전무용, 농악 등 전통의 전수 및 20여 가지의 취미 활동을 위한 강좌를 열고 있다. 이중 고전무용과 농악은 도당제를 위한 준비 작업으로 진행하고 있다. 망실된 축문을 복원하기위해 수많은 축문을 모으고 있으며, 그 방면의 전문가에게 의뢰를 해놓은 상태이다. 또한 역사 탐방로를 만들어 관내의 학생들과 주민은 물론 외국인에게까지 마을의 유서 깊은 전통을 알리고 있다.
그는 수백 년 또는 수천 년이라 할 수 있는 전통적인 마을의 의식을 마치 해서는 안 되는 것으로 간주하는 사람들의 생각을 이해할 수 없다며 사유지인 정선옹주 묘역에 집안사람들과 마을의 뜻있는 인사들의 힘을 모아 도당제를 자체적으로 추진하고 있다는 힘이 실린 의지를 밝혔다.
우리의 먹거리와 옷이 좋은 것임을 뒤늦게 깨닫고 다시 찾고 있는 요즘이다. 우리의 몸과 정신을 건강하게 그리고 모두를 하나 되게 만드는 도당제와 도당축제를 올바르게 보고 되살려야 하는 일이 시급하다는 것을 수궁동 도당제의 복원 현장에서 깨닫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