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3001667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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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農村振興事業-試驗場-航洞-原種場 |
분야 | 정치·경제·사회/경제·산업 |
유형 | 개념 용어/개념 용어(기획) |
지역 | 서울특별시 구로구 |
시대 | 현대/현대 |
집필자 | 손승호 |
[개설]
서울특별시 구로구 항동에 위치하고 있던 경기도농산물원종장(京畿道農産物原種場)은 농산물의 원종을 개량하여 보급하는 업무를 담당하던 시설로, 경기도농촌진흥원의 사업소로 유지되어 오던 시설이다. 농산물 원종장은 일제강점기인 1917년 5월 경기도 부천군 계남면 벌응절리[현 경기도 부천시 원미구 역곡동]에 농촌진흥사업을 위해 세워진 경기도종묘장에서부터 시작한다. 경기도종묘장은 1932년 경기도농사시험장으로 이름이 바뀌었으며, 1949년에는 경기도농사기술원으로, 1957년에는 경기도농사원으로 이름이 바뀌었다.
경기도농사원에서는 농사 지도 사업을 비롯해 농사 연구 사업을 실시함으로써 농촌 사업의 진흥 기관이 되었다. 경기도농사원은 1962년 경기도농촌진흥원으로 바뀌었고, 1998년 9월 14일에 경기도농업기술원으로 이름을 바꾸어 현재에 이르고 있으며, 경기도 화성시 기산동 315번지에 위치하고 있다. 경기도 부천과 서울특별시 구로구 항동에 자리했던 경기도농산물원종장은 서울의 도시화로 인한 시가지 확대, 경기도의 행정 체계 개편 등에 따라 1998년에 폐지되었지만, 그 기능은 항동을 떠나 현재 경기도 화성의 경기도농업기술원에서 계속 이어지고 있다.
[항동의 지리적 특징과 농업]
항동은 현재의 서울특별시 경계가 획정되었던 1963년 이전까지만 해도 경기도 부천군 소속이었다. 조선 영조 때까지는 부평도호부의 항리였으나 1895년 인천부 부평군 항리가 되었으며, 1896년에 경기도 부평군 옥산면 항리가 되었다. 1914년에 이루어진 행정구역 개편으로 경기도 부평군 계남면 항리가 되었고, 1941년에 경기도 부천군 소사읍 항리가 되었다. 항동은 현재 서울특별시의 끝자락으로 경기도 부천시와 마주하고 있는데, 과거에는 경인선 철도가 이 마을을 관통하였다. 항동의 입구에는 ‘마음의 고향 항골’이란 표지석이 설치되어 있다.
항동이란 지명은 마을의 형태가 배 모양이었기에 생겨났다는 견해가 가장 유력하다. 또는 옛날에 항동 일대가 바다처럼 물이 많을 때 배가 마을에 닿았으므로 항동이라고 부르기 시작했다는 해석도 있다. 지명의 유래를 살펴보면, 항동 일대는 저평한 지형으로 형성되어 있음을 유추할 수 있다. 실제 항동의 지형은 마을의 동쪽에 구릉성 산지가 자리하고 있으며, 서쪽으로는 넓은 평지가 분포하고 있다.
항동 일대에 분포하는 토양은 회색토 및 충적토를 비롯해, 저구릉지에는 사양질의 적황색토 및 암쇄토 등으로 구성되어 있다. 이들 가운데 적황색토와 암쇄토는 토양의 비옥도가 낮고 유기물의 함량이 적어 대부분 임야 또는 뽕나무밭, 과수원, 초지 등으로 이용되고 있다.
한편, 회색토 및 충적토는 토양의 비옥도가 높아 논으로 이용되며 벼의 생산량이 많은 편이다. 바로 이 토양이 넓게 분포하기에 구로구는 일찍부터 농업이 발전하였다. 구로구를 대표하는 항동토마토나 오류골참외 역시 이 토양에서 재배된 농산물이다. 특히 시가화의 진전이 늦었던 항동의 주민들은 농업과 매우 밀접한 관계를 맺으면서 생활을 유지하였다.
항동 일대에 경기도종묘장의 종자 시험장이 설치된 것은 이렇듯 토양 조건을 비롯한 자연 환경이 농산물의 원종 시험장으로 적합하다는 판단이 작용한 터였다. 이와 함께 만들어진 것이 항동저수지이다. 항동저수지는 경기도농산물원종장 터와 소로를 사이에 두고 위치하는데, 종자 시험장이 설치된 당시에는 저수지보다 작은 규모인 보의 수준이었으며, 이 물을 농산물 원종장에 끌어다가 농업용수로 활용하였다. 항동저수지와 그 일대는 현재 주민들의 산책로와 낚시터로 활용되고 있으며, 항동저수지 주변 지역에 대해서는 구로구청에서 ‘푸른 수목원 조성 사업’을 실시하고 있다.
[일제강점기의 산미증식계획과 농촌진흥운동]
일제는 1920년대에 들어서면서부터 우리나라를 자국의 식량 공급 기지로 만들기 위하여 쌀 증식 정책을 실시하였다. 일본에서는 제1차 세계대전을 계기로 산업 자본이 비약적으로 성장하면서 자본의 축적이 진행되었지만 농업 부문에서의 생산력은 급격히 떨어졌다. 더욱이 1918년 대규모의 쌀 폭동이 발생한데다 1920년에는 대불황이 닥쳤다.
결국 일본 정부는 자연 자원의 부족 및 농업 발전의 정체에 기인한 식량과 원료의 부족 문제를 해결하는 수단으로 식민지 개발을 적극적으로 시행하게 되었다. 다른 한편으론, 우리나라에 대한 토지 조사 사업이 이미 완료되어 식량 공급 기지로 활용할 수 있는 기초 조건이 갖추어져 있었다. 이에 일본에서는 자국의 식량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1920년부터 산미증식계획을 추진하기에 이르렀다.
산미증식계획은 3차례에 걸쳐 진행되었다. 제1차 계획은 1921년부터 1925년까지의 5개년 계획이었다. 제2차 계획은 1926년부터 1935년까지의 10개년 계획이었지만 1934년에 중단되었다. 그 이유는 우리나라 쌀의 대일 수출 증대로 일본 농업이 위기 상황에 직면했기 때문이다. 1937년에 일본은 중국 본토 침략을 개시하였다. 이에 따라 군량미가 부족해지고 조선 쌀에 대한 수요가 급증하게 되자 1940년에 다시 산미증식계획을 수립하여 추진하였다. 이것이 전시 중에 실시된 제3차 산미증식계획이다.
일제강점기 동안 3차례에 걸쳐 실시된 산미증식계획은 농지 개량과 농사 개량으로 양분되어 추진되었다. 농지 개량에 의한 증산 계획은 관개 시설의 개선, 지목 교환·개간·간척에 의한 농지 확장 등을 목적으로 하였다. 농사 개량에 의한 계획은 품종 개량·퇴비 장려·적기 번식·심경·제초 운동 등을 전개해 단위 면적에서의 수확량을 증가시키는 것이었다.
농사 개선을 위해 일본 정부는 이미 1906년에 경기도 수원에 권업모범장(勸業模範場)을 설치하였다. 권업모범장은 농촌진흥청의 전신에 해당하는 것으로 우리나라 농업 기술의 시험·조사·지도 등을 목적으로 설치된 기관이었지만, 단순히 일본의 농법을 우리나라에 이식하는 정도에 불과한 개선책을 사용하였다. 이후 1908년에는 경기도 도청 소재지에 경기도종묘장을 설치하였다.
종묘장은 1910년부터 조선총독부 산하에 들어가게 되었다. 따라서 1911년부터는 종묘장이 전국적으로 확산되기 시작하여 1917년에는 전국 13개도에 13개소의 종묘장이 설치되었다. 이 과정에서 현재의 서울특별시 구로구 항동 일대에 경기도종묘장이 들어서게 된 것이다.
[1960년대 이전의 원종장]
한편, 1920년대 말부터 세계적인 경제 공황의 여파로 우리나라의 농촌 경제는 파멸 상태에 빠지게 되었다. 1929년 권업모범장은 농업 시험 기관으로서의 임무를 수행한다는 명목으로 농사시험장으로 명칭이 변경되었다. 그리고 1932년에는 전국 13개도에 자리하고 있던 종묘장을 농사시험장 산하 도농사시험장으로 개편하였다. 이에 따라 항동에 자리하고 있던 경기도종묘장은 경기도농사시험장으로 개편되었다.
조선총독부는 농촌 경제를 살리기 위한 대책의 일환으로 1932년부터 농촌진흥운동을 펼쳐 나가면서, 1932년에는 「조선소작조정령(朝鮮小作調停令)」과 「자작농지설정사업(自作農地設定事業)」, 1934년에는 「조선농지령(朝鮮農地令)」을 각각 발표하였다. 그러나 어떠한 사업도 효과를 보지 못한 채 중일전쟁의 도발로 본격적인 전시 체제에 돌입하게 되었다.
경기도농사시험장에서는 벼·대맥·소맥·대두 등의 원종 배부, 과수와 채소의 종묘 배부, 돼지·토끼·닭 등의 가축 배부, 뿌리 작물의 균 배부, 작물 재배에 관한 시험 조사, 과수 및 채소 재배에 관한 시험 조사, 가축의 사양 관리에 관한 시험 조사, 토양 비료에 관한 시험 조사, 중견 청년의 양성, 농사 지식의 보급 등에 관한 업무를 담당하였다. 경기도농사시험장 계남회(京畿道農事試驗場 桂南會)에서는 1939년부터 『경기농보(京畿農報)』를 발행하여 농작물의 재배 방법 및 시험 조사 내용, 벼 품종 개량 방법 등에 대한 내용을 수록하였다. 『경기농보』에서는 계절별로 재배 작물의 재배 방법과 재해 대책 등에 대한 내용도 수록하였다.
농사시험장은 1949년 1월 대통령령 제45호에 의거해 농업기술원으로 개칭되었다. 중앙에는 중앙농업기술원을 설치하여 시험부, 기술교도부, 서무과를 두었다. 그리고 4개 지원을 각각 이리·목포·성환·김해에 설치하였다. 시험부에는 기초 연구과, 농예화학과, 종예과, 원예과, 잠사과, 축산과 등이 설치되었다. 기술교도부에는 생산기술과, 경영기술과, 기술수련과가 설치되었다. 한편, 지방에는 각 도의 교도국과 시험장을 도농업기술원[서무과, 시험부, 기술교도부]으로 통합하였다. 이 시기에 경기도농사시험장은 경기도농사기술원으로 이름이 바뀌었으며, 이를 통해 농촌진흥사업이 연구와 교도로 구분되면서 이원적인 지도 체계를 형성하게 되었다.
1956년에는 「농사 교도법에 관한 협정」이 완성되었다. 이 협정에 포함된 4가지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첫째, 농사 교도 사업의 기구를 법률에 의하여 설치한다. 둘째, 사업을 수행하기 위하여 명확한 행정 계통을 수립한다. 셋째, 소요 예산은 국회의 예산 조치에 의하여 충당한다. 넷째, 농사 교도 기관에는 비정치적이고 중립적인 입장에서 충분한 지식과 기술을 훈련 받은 인재를 배치한다. 이는 우리나라 농촌 지도 사업에 관한 최초의 법적 근거를 제시해 주는 것이기도 하다.
1957년 「농사교도법」이 국회를 통과함에 따라 법률로 공포되고 농사원이 개원하였다. 이를 통해 농촌 지도가 법적으로 보장받게 되고, 연구 사업과 교도 사업이 단일 행정 체계에 총괄되었으며, 농업행정과의 이원적 지도 체계를 농사원의 교도 사업으로 일원화하게 되었다. 그동안 독립적으로 실시해 온 시험장과 연구소의 기능을 조정하고 통합할 중앙 기구의 기능이 강화된 것이다. 그리하여 농사와 관련한 각종 시험 기구를 농사원으로 통합하고 각 도에는 도농사원을 설치하였다. 그리고 농사기술원이 현재 농촌진흥청의 전신에 해당하는 농사원으로 변경됨에 따라 경기도농사기술원도 경기도농사원으로 개편되었다.
1957년에 발족된 농사원에는 중앙에 2국[시험국, 교도국], 5시험장[농업시험장, 원예시험장, 잠업시험장, 임업시험장, 축산시험장], 1연구소[가축위생연구소]를 두었다. 1961년에는 농사원을 전면 개편하여 중앙에는 2국[시험국, 지도국], 8부[기획관리부, 식물환경부, 작물원예부, 임산부, 축산부, 수의부, 잠사부, 농공이용부], 1시험장[고령지시험장]으로 개편하였고, 지도국 밑에 4개과[계획과, 기술과, 생활과, 공보과]를 두었다. 각 도에 설치된 도농사원에는 시험국[제1시험과, 제2시험과]과 교도국[서무과, 교도과, 기술보급과]을 설치하였다.
[농촌진흥청 발족과 경기도농촌진흥원]
1962년에 들어 농사원, 농림부 지역사회국, 농림부 훈련원, 농림부 제주목장, 중앙전매연구소의 연초시험장 등을 통합한 농촌진흥청이 발족되었다. 농촌진흥청은 중앙에는 2국[시험국, 지도국]을 설치하였고, 11개소의 연구소 및 시험장[수련소, 식물환경연구소, 작물시험장, 원예시험장, 임업시험장, 잠업시험장, 축산시험장, 가축위생연구소, 농공이용연구소, 고령지시험장, 제주시험장]으로 구성되었다. 지방에는 도농촌진흥원을 도지사 소속으로 두었다. 도농촌진흥원은 도농사원, 도산업국의 지역사회과 및 도의 농사 시험 지도 사업 기능을 통합·흡수하였으며, 시군에는 시장·군수 소속하에 농촌지도소를 발족시켰다. 도농촌진흥원의 산하 기관에는 임목양묘장, 잠종장, 종축장, 가축보건소 등이 포함되었다.
이에 따라 경기도농사원은 1962년 4월에 경기도농촌진흥원으로 개칭되었고, 서무과·시험과·지도과로 개편되었다. 그 후 1967년에 경기도농촌진흥원 기구를 폐지하고 담당 업무 가운데 임목 양묘장과 임업 업무를 삭제하였다. 1970년에는 도농촌진흥원에 ‘국’을 신설하여 기존의 3과[서무과, 시험과, 지도과]를 2국[시험국, 지도국] 6과[작물과, 식물환경과, 지도과, 기술보급과, 농촌사회과, 서무과]로 개편하였다. 조직이 보강된 경기도농촌진흥원은 1971년에 지역사회개발 및 생활개선, 청소년 담당 등의 업무 부서를 신설하였다.
농촌진흥원은 농촌진흥청의 예하 기관으로 각 도 단위로 농촌 지도 사업을 총괄하였다. 농촌진흥원에서 지도한 내용은 기술 보급 지도, 농촌 사회 지도, 농업 경영 개선 지도, 농업 기술 공보 등이 있다. 이외에도 농촌진흥원에서는 농민의 영양 섭취 상태, 건강 상태, 식습관, 농업 경영 및 사회 경제 실태에 관한 조사 등을 실시하였으며, 농민의 영양 상태를 개선하기 위해 단백질 식품이나 비타민 식품과 같은 영양 식품 생산을 지도하였다.
[농산물원종장의 조직 변화와 폐지]
서울특별시 구로구 항동에 위치했던 농산물원종장에는 1971년에 서무계와 시험계가 설치되었으며, 근무하는 직원은 총 8명에 불과했으나, 사업소의 규모가 커지면서 직원의 수도 증가하여 1973년에는 15명이 되었다. 1979년에 들어 경기도농산물원종장에 설치되어 있던 사업계를 폐지하는 대신 답작계와 전작계를 추가하였으며, 직원 수는 18명으로 증가하였다. 1981년에는 기술담당관이 신설되면서 직원도 22명으로 증가하였다. 1991년에는 관리계가 신설되면서 1담당관[기술담당관] 4계[서무계·답작계·전작계·관리계]가 배치되어 경기도농산물원종장의 기능을 보강하였다. 경기도농산물원종장은 1998년의 경기도 행정기구 개편 시에 폐지되었는데, 당시에 근무하던 직원은 20명에 달하였다. 이후 경기도농산물원종장의 기능은 1998년에 경기도농촌진흥원이 경기도농업기술원으로 개편되면서 경기도농업기술원에 편입되어 현재에 이르고 있다.
경기도농업기술원에서는 여러 가지 사업을 실시하고 있다. 그 가운데 농산물원종장이 수행했던 기능과 연관되는 것으로는 농작물의 우량 품종 육성, 농산물의 우량종자·종묘 등의 보급, 농작물의 품질 향상, 미곡·맥류 등 중요 농산물의 우량종자 생산 및 보급, 우량 원잠종 생산 및 잠업에 관한 시험 실시와 기술 보급 등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