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300166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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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어의미역 | Hard Life of Laborers in Beoljipchon |
분야 | 역사/근현대,생활·민속/생활 |
유형 | 개념 용어/개념 용어(기획) |
지역 | 서울특별시 구로구 |
시대 | 현대/현대 |
집필자 | 김영순 |
[개설]
포털 사이트인 다음의 지도 검색창에 ‘가리봉시장’을 입력하면 서울지하철 7호선 남구로역 주변에 몇몇 지명들이 표시되어 있는 지도를 볼 수 있지만, 가리봉동 및 구로 2~4동 지역에는 주변과는 달리 지명이 표시되지 않은 곳을 발견할 수 있다. 바로 이곳이 한 때 그리고 지금도 속칭 ‘벌집촌’으로 불리고 있는 지역이다.
벌집이란 벌들이 모여 사는 집을 말한다. 그러나 구로공단 근방에 자리했던 벌집촌에는 진짜 벌들은 없고 일명 ‘공순이’와 ‘공돌이’로 불렸던 근대화의 주역이자 산업 일군인 노동자들이 살고 있었다. 벌집촌이 생기게 된 배경은 국내 1호 공단인 구로공단의 조성과 맥을 같이한다.
구로공단은 수출산업단지개발조성법에 따라 현재의 서울특별시 구로구 구로동과 금천구 가산동 일대 1.98㎢에 1965년부터 1973년까지 3개 단지로 조성됐으며 정부의 수출 주도 정책에 힘입어 1970년대 고도성장의 심장부 구실을 수행하였다. 봉제, 가발, 완구 등 저임금에 기초한 노동 집약적 경공업이 터를 잡아 한때 국내 총 수출액의 10%를 차지하기도 하였다. 이와 더불어 농촌의 어린 소녀, 소년들이 구로공단으로 유입되면서 주변에 이들 노동자들을 중심으로 하는 주거지가 형성되었고 좁은 공간에 비해 상대적으로 많은 인구 또는 가구가 밀집되어 있다고 하여 속칭 ‘벌집촌’으로 불리게 되었다.
그러나 2000년 이후 제조업들의 급속한 쇠퇴와 더불어 노동 환경이 열악해지면서 벌집촌의 주인공들도 조선족 이주 노동자들 중심으로 바뀌어 지게 되었다. 그리고 뉴타운 사업으로 인해 앞으로는 구로 지역에서 벌집촌을 찾아보기 힘들게 될 것으로 보인다. 이 글에서는 역사적 뒤안길로 사라지고 있는 이 벌집촌의 주인공들, 즉 도시 노동자들의 슬프지만 아름다운 삶을 그려본다.
[‘용욱이 편지’를 통해 본 벌집촌의 삶]
구로동 8.3㎡~13.2㎡ 정도의 간이 주택과 구호 주택들이 밀집되어 있고 아침이면 볼일을 보기 위해 공중 화장실 앞에 줄을 지어서서 진풍경을 연출하던 곳, 바로 벌집촌이다. 방 한 칸과 부엌 한 칸을 하나로 묶은 여러 개의 주거 공간을 한데 모은 형태의 많은 벌집촌의 주택들은 벌집과 비슷하다. 벌집촌은 어떤 형태를 띠고 있으며 어떤 주거 환경인가.
우리는 2001년 한여름에 실제 존재하지 않는 ‘구로초등학교 3학년 용욱이’가 네티즌들을 울렸다는 오마이뉴스 기사에서 벌집촌의 생활상을 살펴볼 수 있다. 2001년 7월 26일 오마이뉴스 제보란에는 이런 사연이 올라왔다. “이글은 서울시 어린이글짓기대회에서 1등을 한 구로초등학교 3학년 용욱군의 글입니다. 너무나 감동적이어서 글을 옮겨 씁니다.”라고 시작한다.
사랑하는 예수님 안녕하세요? 저는 구로동에 사는 용욱이에요. 구로초등학교 3학년이고요. 우리는 벌집에 살아요. 벌집이 무언지 예수님은 아시지요. 한울타리에 55가구가 사는데요, 방벽에 1, 2, 3, 4..... 번호가 써 있어요. 우리 집은 32번이에요. 화장실은 동네 공중변소를 쓰는 데요. 아침에는 줄을 길게 서서 차례를 기다려야 해요. 줄을 설 때마다 저는 22번 방에 사는 순희 보기가 부끄러워서 못 본척하거나 참았다가 학교 화장실에 가기도 해요.
우리 식구는요. 외할머니와 엄마 내 동생 용숙이랑 4식구가 살아요. 우리 방은 할머니 말씀대로 라면 박스만 해서 4식구가 다 같이 잠을 잘 수가 없어요. 그래서 구로2동 술집에 나가서 일하시는 엄마는 술집에서 주무시고 새벽에 오셔요. 할머니는 한 달에 2번[그것도 운이 좋아야]취로 사업장에 가서 돈을 버시고요. 아빠는 청송감호소라는 데 계시는데 엄마는 우리보고 죽었다고 그래요.
예수님 우리는 참 가난해요. 그래서 동회에서 구호 양식을 주는 데도 도시락 못 싸 가는 날이 더 많아요. 엄마는 술을 많이 먹어서 간이 나쁘다는 데도 매일 술 취해서 어린애 마냥 엉엉 우시기를 잘하고 ‘이 애물들아 왜 태어났니 같이 죽어 버리자’ 하실 때가 많아요.[이하 생략]
속칭 ‘벌집’으로 불리는 9.9㎡ 남짓한 쪽방에 산다는 ‘구로초등학교 3학년 용욱이’의 절절한 사연이 2001년 인터넷 공간에 급속히 퍼지면서 네티즌들을 울렸다. 예수님께 쓰는 편지글 형식으로 작성된 용욱의 글은 구로동 벌집촌의 실상을 생생하게 묘사해 놓고 있다.
이 편지글을 통해서 1개의 주택 안에 50개가 넘는 세대들이 각기 사용하는 방들이 다닥다닥 붙어있다는 것, 그 많은 세대들이 화장실은 동네 공중변소를 공동으로 사용해야 한다는 것, 그래서 매번 자기 차례가 되려면 기다려야 하는 시간이 많이 걸린다는 것 등의 열악한 생활 조건을 알 수 있다. 또한 엄마는 술집으로, 아빠는 이유는 모르겠지만 감호소 생활을 하고 있고, 할머니는 취로 사업에 동원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또한 1980년대 근대화 사업의 일환으로 추진된 소도시의 새마을공장 및 대도시의 산업 공단의 설치로 인한 이촌향도 현상과 이에 따른 다양한 사회문제들, 즉 산업화로 인한 가족 해체나 열악한 도시 빈민의 모습들을 벌집촌을 통해 생생하게 확인할 수 있다.
흥미로운 것은 이 편지가 픽션이냐 논픽션이냐 하는 논란이다. 이 글이 인터넷을 통해 급속도로 확산되면서 신문사·방송사들이 용욱이를 찾아 나서고 있다. 오마이 뉴스의 기사[2001. 8. 3]에 따르면 그 편지글은 2001년이 아닌 1991년 이전에 쓴 것이었다고 한다.
그 글이 세상에 처음 나온 것은 기독교잡지 『낮은 울타리』의 1991년 5월호를 통해서였다. 이 잡지에는 「난 못죽어 인제」라는 제목의 글이 실렸다. 인터넷을 통해 급속도로 확산된 ‘용욱의 글’은 바로 「난 못죽어 인제」라는 글과 동일한 글이다. 그 글이 인터넷을 떠돌면서 ‘국민학교’가 ‘초등학교’로, ‘청송감호소’가 ‘청송교도소’로 바뀌고 내용도 더 매끄러워졌으며 ‘1991년 구로국민학교 3학년 용욱’이도 ‘2001년 구로초등학교 3학년 용욱’이로 부활하였다.
그렇다면 용욱이의 편지글에 등장하는 ‘벌집촌’은 현재 실재하는 걸까. 현재 구로초등학교 인근에는 새 건물이 많이 들어섰지만 그 옆 동네인 구로3동과 가리봉동 일대에는 아직까지도 벌집촌이 남아있다.
[현 벌집촌의 주인공]
필자는 2009년 5월부터 6월 사이 벌집촌의 현지 조사를 위해 가리봉동 일대를 세 차례 방문하였다. 서울지하철 7호선 남구로역과 가산디지탈단지역 사이에 재래시장인 가리봉시장이 있고 이 시장에 들어서면 여기가 중국의 한 거리인가 아닌가 하는 착각이 들 정도로 붉은 색 배경의 중국어 간판이 휘황찬란하였다. 우선 이 거리에서는 한글보다 한자로 된 간판이 더 많이 눈에 띄며 우리 식 한자도 아니었다. 한국 사람들에게는 낯선 간자체 중국어로 쓴 간판들이었다.
거리 초입부터 우리나라 말보다 낯선 중국말들이 왁자지껄했고 카세트테이프를 판매하는 노점에서는 중국 노래가 동네를 들썩일 만큼 큰 소리로 흘러나오고 있었다. 그 주위에서는 10여 명이 중국 TV 방송을 보며 웃고 떠드는 모습도 보였다. 게다가 심심찮게 들려오는 중국말들로 인해 “무슨 비밀 이야기이기에 굳이 중국말로 할까” 하는 의문도 들었다.
주민들의 말에 의하면 중국 동포들은 자신들끼리는 중국어로 이야기하는 것을 더 편하게 여긴다고 하였다. 거리를 반나절 정도 돌아다니는 동안 이런 중국 동포들은 어디서나 쉽게 마주쳤다. 게다가 최근에는 가리봉동에 ‘한족’으로 불리는 ‘오리지날 중국인’도 많이 들어와 있다고 한다.
거리를 따라가다 보면 ‘전화방’이라는 간판을 내건 상점이 종종 눈에 띄었다. 한국 사람들은 이 간판을 보고 불건전한 한국식 전화방을 떠올릴 수도 있겠지만 전혀 다른 성격의 업소였다. 중국 등 외국에 국제 전화를 걸 때 유료로 사용할 수 있는 개인 소유의 중국식 공중전화가 설치된 곳이다. 뿐만 아니라 골목마다 노래방이 있었는데 주말이면 중국 교포들에 의해 흘러간 옛 노래가 단골로 등장하고 있을 정도로 성업 중이라고 하였다.
시장의 안쪽으로 들어서야 한국의 재래시장을 만나볼 수 있었고 잡화, 식품 등의 장사를 하는 한국 상점 주인들을 만날 수 있었다. 가리봉 재래시장에서 20여 년간 참기름, 들기름 등의 기름 장사를 해온 한 상인은 요즘엔 내국인 손님보다 중국어를 사용하는 중국 이주 노동자와 연변 교포 손님들이 훨씬 많고 특히 주말과 일요일의 경우 ‘여기는 중국’이라고 하면서 씁쓸한 웃음을 지었다. 그리고 한편으로는 단골이었던 한국 서민들이 거의 다 이사를 가고 한동안 장사가 안 되었지만 그 자리를 중국 교포 이주민들이 대신하게 되면서 다시 나아졌다고 하였다.
그리고 시장 골목을 지나 안쪽으로 들어가면서 2층 혹은 단층의 연립 건물들이 형성되어 있는데, 겉보기에는 여느 가정집과 다름없지만 자세히 살펴보면 전기 계량기라고 할 수 있는 두꺼비집들이 다닥다닥 붙어 있고, 방문의 수도 10개 이상이 넘는다. 이것이 바로 용욱의 편지에 등장했던 벌집촌의 현재의 모습이다.
그렇다면 현재 이 벌집촌에는 누가 살고 있을까. 2009년 5월 12일[부처님오신날] 오후 1시, 벌집촌을 방문하기 위해 가리봉 시장을 찾았다. 마침 휴일이라 서울특별시 구로구 가리봉1동·가리봉2동 ‘조선족거리’로 불리는 이곳은 휴일을 맞아 평소보다 많은 사람들로 붐볐다. 우선 2003년 이래로 이 지역에서 ‘중국동포타운신문사’를 운영해온 김용철 대표를 만나 이곳의 현황에 대해 들었다.
김용철의 말에 의하면 한 주택 당 평균 6가구가 살고 있는 벌집촌은 지금도 보증금 30~50만원, 월세 13~15만원에 임대차가 이뤄지고 있으며 방 한 칸과 부엌을 합쳐 9.9㎡~13.2㎡를 넘지 못하는 수준이라고 하였다. 쪽방마다 매겨진 번호표도 여전하며 대부분의 벌집은 이 일대에 공단이 들어설 당시 지어진 채로 15년에서 20년간 별다른 개선이 이루어지지 않은 채 임대되고 있다고 하였다.
가리봉1동 벌집촌 근처에 만난 한 40대 아주머니는 "햇빛이 전혀 들지 않는 방이 많아 사람 살 데가 아니지만 서울의 타 지역에 비해 비교적 낮은 보증금과 월세로 버틸 수 있으니 그나마 다행”이라고 말했다. 1991년의 용욱이의 실체는 가려져 있지만 그 용욱이를 가슴 아프게 한 벌집촌의 곤궁한 삶의 현실은 한국인 노동자에서 중국인 교포 이주 노동자로 주인공들만 바뀌었을 뿐 아직도 이어지고 있어 필자의 마음을 서글프게 했다.
[문학 속에 그려진 벌집촌의 삶]
여타 지역 사회와 마찬가지로 벌집촌에도 아름다운 사랑이 있고 사람들 간의 애환이 있으며 이야기들이 머물러 있다. 노동 문학이라는 범주에서 벌집촌도 문학의 대상이 되곤 했다. 먼저 문학 작품 속에 나타난 벌집촌을 살펴보자. 해남에서 상경해 구로공단에서 일을 하며 시를 썼다는 김사이 시인은 자신의 시집 『반성하다 그만둔 날』에서 구로공단 노동자의 애환을 그리고 있다. 이 시집은 노동자이자 시인으로서 15년 세월을 구로와 함께 해 온 시인의 반성의 흔적이자 자기 고백이다. 시인은 「사랑은 어디에서 우는가」라는 시를 통해 벌집촌을 닭장촌으로 부르고 있다.
재개발도 안 되고 철거만 가능하다는 곳/ 삶이 문턱에서 허덕거린다/ 햇살은 아무것이나 붙들어 들어갔다 뺐다 하고/ 선과 악이 날마다 쌈박질하며/ 그 속으로 더욱 궁둥이를 들이밀고/ 달아나려 매번 자기를 죽이면서도 눈을 뜨는/ 내 바닥 불륜의 씨앗이 작은 방죽처럼 둥그렇게 모여 있는/ 닭장촌, 정착지도 모르고 날아들었다가/ 가로등 불빛에 타죽어 가는 날벌레 목숨 같은/ 오누이가 사랑을 하고 사촌오빠가 누이를 범해 애를 낳는 그곳/ 온몸 짙푸른 얼룩을 감추기 위해 더워도 옷을 벗지 않는/ 엄마가 얇은 시멘트 벽 옆집 남자랑 도망가 없어도/ 어른이 되어가는 그곳/ 수많은 세대들이 서너 개의 공동화장실을 들락거리는 그곳/ 문밖에 버려진 작은 화초들, 으깨진 보도블록에서 솟아나는 풀들/ 바닥 틈 속에서 살랑살랑 흔들리고 있다/ 간혹 보일 듯 말듯 한 꽃도 토해놓고/ 나 도망가다 멈춰 선 그곳 [김사이, 「사랑은 어디에서 우는가」]
또한 대표적인 노동 시인으로 알려진 박노해 시인은 자신의 시집 『노동의 새벽』에서 구로의 모습을, 특히 벌집촌의 중심이었던 가리봉시장을 배경으로 도시 노동자들의 애환을 그려내고 있다.
“가리봉 시장에 밤이 익으면/ 피가 마르게 온 정성으로/ 만든 제품을/ 화려한 백화점으로/ 물 건너 코 큰 나라로 보내고 난/ 허기지고 지친/ 우리 공돌이 공순이들이/ 싸구려 상품을 샘나게 찍어두며/ 300원어치 순대 한 접시로 허기를 달래고/ 이리 기웃 저리 기웃/ 구경만 하다가/ 허탈하게 귀가길로/ 발길을 돌린다” [박노해,「가리봉시장」]
적어도 1980년대에 돈 벌러 서울 오면 구로동으로 온다고 했을 만큼 구로공단은 “밑바닥 인생이 거쳐 가는” 곳의 대명사였다. “누가 들고 나는지 모르는” 6.6㎡ 남짓한 닭장촌에 몸을 누이고, 월급날을 손꼽아 기다리며 가리봉시장의 싸구려 상품과 먹을거리를 향유하던 이들. 김사이 시인 역시 보따리 하나만 들고 지방에서 상경해 20만 원 정도의 월급으로 지하 쪽방 생활을 전전하던 문학청년이었다. 오직 구로를 떠나기 위해 악을 쓰며 일을 했지만 결코 그 곳을 벗어나지 못하고 있었다.
그런데 지금 구로의 모습은 그간 산업화의 열기가 묻어나던 세월이 언제였던가를 생각해 보게 한다. 현재의 구로는 디지털산업단지가 들어서고 재개발로 하루가 다르게 변화하고 있는 공간이다. 벤처 산업이 발을 내딛고 아파트형 공장이 들어선다. 벌집촌을 둘러싼 구로는 어려운 삶을 영위하는 도시 빈민과 부자들이 자신들만의 낙원을 건설하려는 욕망으로 대결되는 공간이 되었다. 그러나 무엇보다 중요한 변화는 이제 구로 어디서든 속칭 ‘공돌이와 공순이’라고 불리던 한국 근대화의 기수들을 찾아볼 수 없다는 것이다.
[영화 속에 나타난 벌집촌의 삶]
문학 속에 나타난 것과 유사하게 영화에 나타난 벌집촌의 삶 또한 온통 회색빛이다. 구로와 벌집촌의 모습을 찾아볼 수 있는 대표적인 영화는 바로 『구로아리랑』과 『장미빛 인생』이다. 이 두 영화에서 우리는 벌집촌에 사는 도시 노동자들의 삶과 사랑의 모습을 엿볼 수 있다.
먼저 『구로아리랑』을 살펴보면, 이문열의 소설을 바탕으로 박종원 감독이 제작한 영화이다. 이 영화의 무대는 구체적으로 구로동의 공단 사거리에 있는 ‘아세아패션’이라는 중소기업이다. 구로에서는 각종 물건들이 생산되어 나오는데 생산직 중에서도 가장 힘들고 박봉이라고 알려져 있는 곳이 이런 봉제 공장이다.
『구로아리랑』에는 공장에 다니게 된 공순이라고 불리던 여공들의 전형적인 모습이 잘 나타나 있다. 시골 어머니의 병환과 남동생 대학 진학 문제로 고민이 많은 종미[옥소리 분]는 야학에 다니고 있으나 노조 결성에는 회의적이다. 고아에다 악바리처럼 돈을 알뜰살뜰 모으는 미경은 ‘돈순이’라고 불린다. 정자는 돈 때문에 ‘이태원이나 나갈까?’하고 고민하다 결국은 여관에서 매춘을 하기도 한다. 이런 여공들의 삶에 동참하게 된 숙희[신은경 분]는 자취방에서 하는 환영식에 맥주가 있는 것을 보고 “어머, 공순이도 맥주 마셔?” 하며 놀란다. 그리고 공장 식당에서 밥을 받고는 한숨 쉬며 “꼭 개밥 같애”라고 불평한다.
영화에서 대부분의 여공들은 늘 먼지 속에서 웅크리고 앉아 미싱을 박는다. 이들은 변비와 치질에다 밤에 머리가 아파서 잠을 잘 못자는 직업병을 늘 안고 산다. 그리고 계속되는 철야와 야근에도 불구 이들은 당시 한 달에 20만 원 정도 받으면서 늘 돈이 부족하여 한숨지어야 했다.
다음은 영화 『장미빛 인생』에 나타난 구로와 벌집촌의 모습을 들여다보자. 이 영화는 가리봉의 한 만화방에 모여드는 사람들을 그린 김홍준 감독의 작품이다. 구로동에 비해 방값이 더 싼 가리봉동에는 일용직 노동자들이 많이 산다. 영화 속의 엄지 만화방은 떠돌이, 잘 곳 없는 일용직 노동자들, 가출한 청소년이 천원만 내면 하룻밤 몸을 의지할 수 있다. 무표정하고 무관심하고 퉁명스런 만화방 주인 신마담이 “심야 영업 준비해요” 하면 다들 천원을 낸다. 그 후에는 야한 비디오를 보거나 화투를 치기도 한다.
어두컴컴한 만화방에서 하룻밤을 지새운 이들은 아침이면 나가야 한다. 영화에서는 이른 아침 가리봉 거리에 나가면 한 곳에 불을 피워 놓고 웅성웅성 모여 있는 사내들을 볼 수 있다. 그들은 여기서 그날 할 일을 배당 받아 주로 공사장에 가서 일을 한다. 비가 오면 쉬고, 일을 한 날은 가리봉시장이나 가리봉 오거리에서 소주 한 잔을 한다.
이 만화방에 흘러들어온 세 명의 남자가 있다. 깡패 동팔이, 작가 지망생 유진, 운동권인 기영, 이 세 명은 모두 쫓기는 몸이다. 동팔[최재성 분]은 살인죄의 혐의를 받고 쫓기는 몸이고, 유진은 아르바이트로 무협지를 쓰던 중 정치 상황을 풍자했다가 이적 표현물을 작성했다는 죄목으로 수배 중이다. 또한 기영은 학생 운동권 출신으로 위장 취업을 해서 노동자들을 주동했다는 혐의로 피해 다니고 있다. 만화방이 이들에게 은신처가 된 것은 큰 돈 없이 잠들 수 있고, 워낙 떠돌이들이 많이 오고 가므로 낯선 사람들을 의심하지 않기 때문이었다.
영화 속 가리봉의 풍경은 작고 허름하다. 중고 가전제품 가게, 3류 성인 극장, 구멍가게, 전자오락실, 다방, 그리고 어우동 쇼를 하는 술집의 풍경이 드러난다. 구로동보다 더 싼 월세방이 있는 가리봉동, 지금도 가리봉동에는 벌집촌들이 여전히 남아 있고, 거기에 사는 사람들의 삶도 별반 없이 과거 그대로인 듯하다. 단지 우리들의 슬픈 공돌이와 공순이들 대신에 중국인 이주노동자로 그 주인공들이 바뀌었을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