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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많은 홍예문 다리 설화」 이전항목 다음항목
메타데이터
항목 ID GC03001592
한자 恨-虹霓門-說話
영어음역 Han Maneun Hongyemun Dari Seolhwa
영어의미역 Tale of Hongyemun Bridge
이칭/별칭 한다리,홍아문 다리
분야 구비 전승·언어·문학/구비 전승
유형 작품/설화
지역 서울특별시 구로구|인천광역시 계양구
시대 조선/조선 후기,근대/일제 강점기
집필자 김미경B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성격 설화|다리유래담
주요 등장인물 홍예문 다리 석공
관련지명 계산동
모티프 유형 다리가 언제 헐리게 될 것이라는 예언

[정의]

서울특별시 구로구에서 홍예문 다리와 관련하여 전해 내려오는 이야기.

[개설]

「한 많은 홍예문 다리 설화」는 옛날 구로구가 속해 있던 부평부의 부평평야 굴포천을 가로 질러 놓은 다리를 ‘한다리’라고 일컫게 되었다는 유래담이다. 본래 한다리는 크다는 의미를 지니고 있었으나 일제강점기에 철거되는 등의 액운을 겪었기에 한이 많은 다리로 의미가 변이되었다.

[채록/수집상황]

1997년 구로구지편찬위원회에서 간행한 『구로구지』에 설화의 내용이 기록되어 있으며, 과거 구로가 속해 있던 부평부의 현재 행정시인 인천광역시 하천살리기추진단 홈페이지에 관련 내용이 실려 있다.

[내용]

옛 구로가 속한 지역인 부평부의 계양산과 중구봉 사이 골짜기에서 시작되는 계산천은 먼동재[望東山] 기슭을 스치고 고성산(古城山) 냇물을 받아 계산동 살나리[서부간선 다리 건너편 마을]로 흘러 한다리개[大橋川]로 합류한다. 여름철 장마에 계산천은 삽시간에 범람했다. 큰물에 휩쓸린 주춧돌 같은 큰 돌이 마을을 덮치기 일쑤였고, 개울둑은 매년 터져 농경지가 물에 잠기곤 했다. 『부평읍지』에 따르면 ‘크다라는 뜻’을 갖는 한다리는 부평부 동쪽 10리 거리 직포에 가설된 돌다리로 홍예를 틀어 세 개의 수문을 만들었다. 홍예란 앵 끝이 처지고, 가운데는 무지개처럼 둥글고 높게 솟은 모양을 말한다. 한다리의 홍예문은 세 개의 홍예를 연결해서 만든 것으로 석축이 굉장히 교묘했다고 한다.

이 다리는 조선 후기 고종 때(1884년)에 만든 것으로, 세곡인 삼남 지방의 대동미를 서울 용산의 경창으로 옮기는 수송 과정에서 반드시 지나가야만 하는 다리였다. 서구 원창동 갯말 포리에서 한다리를 이용하면 해상을 거치지 않고 서울로 곧바로 수송을 할 수 있었다. 따라서 한다리의 역할은 중요했다. 이 때문에 다리를 놓을 때도 명성 높은 전국의 석공들을 불러 시공했다고 한다.

한다리는 다리를 놓은 지 60년 정도 지난 후 일제강점기 말 경인고속도로의 전신인 군사도로를 만들 때 직포의 배수를 원활히 하기 위해 철거됐다. 그런데 이 다리를 없앨 때 난간에서 다리를 처음 가설할 때 쓰던 석공의 연장이 발견됐고, 다리가 언제 헐리게 될 것이라는 예언이 적힌 글귀가 발견됐다고 한다. 그리고 그 연대에 맞추어 다리가 헐린 기묘한 일이 발생한 것이다. 일제는 한다리 대신에 북쪽 10m 지점에 중앙교라 이름 지어진 콘크리트 철구조로 이루어진 다리를 가설했다. 현재 이 다리는 부천시 하수종말처리장 뒤편에 쓸모없는 폐교로 남아 있다.

[모티프 분석]

「한 많은 홍예문 다리 설화」의 주요 모티프는 ‘다리가 언제 헐리게 될 것이라는 예언’이다. 홍예문 다리 설화는 다리의 건축과 철거에 얽힌 다리설화이다. 홍예문 다리는 한이 많다. 1884년 하천의 범람으로 민중이 고통을 받던 시기에 조선의 중앙정부는 세곡을 실어 나르기 위해 홍예문 다리를 세웠다. 그리고 일제강점기에는 군사도로를 건설하기 위해 철거되었으니 한이 서릴 수밖에 없는 것이다. 무엇보다도 이 다리를 만들었던 석공이 이러한 사실을 예언했다는 것이 비참하기까지 하다.

[참고문헌]
  • 『구로구지』 (구로구지편찬위원회, 1997)
  • 인천서구문화원(http://www.seogucul.or.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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