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300158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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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仁祖父王-山役- |
영어음역 | Injo Buwangui Sannyeokgwa Namuseori |
영어의미역 | Tale of Namuseori's Orgin |
분야 | 구비 전승·언어·문학/구비 전승 |
유형 | 작품/설화 |
지역 | 서울특별시 구로구|인천광역시 계양구 |
시대 | 조선/조선 후기 |
집필자 | 김미경B |
[정의]
서울특별시 구로구에서 인조 부왕과 관련하여 전해 내려오는 이야기.
[개설]
「인조 부왕의 산역과 나무서리」는 조선 제16대 왕 인조(仁祖)의 부왕인 원종(元宗)[사후 추대]의 능에 대한 풍수지리담이자 나무서리에 대한 지명유래담이다. 이 설화의 시대적 배경이 되는 조선시대에는 구로가 부평부에 속해 있었다. 장릉(章陵)은 사적 제202호로, 인조의 부왕인 원종과 인헌왕후(仁獻王后)의 능이다. 부왕의 능이 처음부터 이곳에 위치했던 것은 아니다. 초장(初葬)은 1620년 경기도 양주군 군장리에서 행했으나, 1627년(인조 5)에 김포 풍무동으로 이장했다. 인조의 부왕 정원군(定遠君)이 1619년(광해군 11)에 서거하자 양주 곡촌리에서 장사지냈던 것을 1627년(인조 5) 8월 27일에 김포현 성산(城山)으로 천장하고, 1632년(인조 10)에 정원군을 원종으로 추존하면서 능호를 장릉이라 고쳤다. 그리고 흥경원의 조성 당시 왕의 예로서 하지 않았던 석물(石物)을 왕릉제로 개수하였다. 한편 「장릉 조성시 북잡이 지관 이야기」도 장릉에 관련된 설화이므로 참고할 필요가 있다.
[내용]
조선의 16대 왕 인조가 아버지 원종의 능을 옮기려고 묏자리를 잘 보는 지관(地官) 한 사람만 데리고 계양산 근처로 갔다. 아무도 그가 왕인 줄을 몰랐다. 도중에 인조 왕과 지관은 산기슭에 관을 놓고 묏자리를 파고 있는 가난한 사람을 목격했다. 그런데 보아하니 그곳은 수맥이 흐르는 험한 묏자리가 아닌가. 왕이 그 가난한 사람에게 다가가 은화 한 닢을 주며 말했다. “사정이 어려운 모양인데 이걸 받으시오.” 묏자리를 파던 가난한 사람은 “매우 인자하신 양반님이시군요. 참으로 고맙습니다.”라고 하면서 고개 숙여 감사하며 은화를 받았다. 지관이 말했다. “여보시오. 그런데 여기는 나쁜 묏자리요. 왜 여기다 부모를 묻는단 말이오?” 가난한 사람이 대답했다. “저희 이웃에 묏자리 잘 보는 노인이 있습니다. 그 분이 이곳이 명당이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지관이 막 관을 내린 무덤을 들여다보니 흙이 말라 있지 않는가.
왕과 지관은 기이하게 여겨서 그 가난한 사람이 일러주는 노인을 찾아갔다. 백발노인이 멍석 위에 앉아 나막신을 깎고 있었다. 지관이, “나는 한양에서 높은 분을 모시고 온 사람이오. 조금 전 한 가난한 농부가 매우 험한 곳에 부모의 관을 파묻는 것을 보았소. 왜 거기를 짚어 주었소?”라며 물었다. 노인은, “거기는 관을 내리자마자 금방 재물을 얻는 명당이지요.”라고 대답했다. 왕과 지관은 깜짝 놀랐다. 노인의 말대로 그 가난한 농부는 하관과 거의 동시에 대왕에게서 은화를 받았던 것이다. 지관이 물었다. “노인께서는 도통했으면서 왜 나막신을 깎으며 사시오?” 백발노인은 노인답지 않게 빛나는 눈으로 두 사람을 번갈아 보았다. “나라님의 나막신을 깎습니다. 그 분은 곧 나를 보러 오실 것입니다. 신은 신발이 불편해서 발이 부르트셨을 것입니다.” 인조왕은 정말로 나막신을 신고 있었고, 그것이 발에 안 맞아 불편해 하고 있었던 것이다.
깜짝 놀란 왕이 그제야 수행해 온 지관에게 눈짓을 했다. 그러자 지관이 소리쳤다. “노인은 전하께 절을 올려라. 전하께서는 부왕의 묏자리를 찾아다니는 중이시니라.” 백발노인은 허둥지둥 엎드리며 이마를 땅에 댔다. “용서하시옵소서. 전하이신 줄 모르고 함부로 입을 놀렸사옵니다.” 왕은 백발노인을 일으켜 세우고 부왕을 모실 명당을 찾으라고 명했다. 백발노인은 왕을 북성산으로 모시고 갔다. “전하, 이곳이 가장 좋은 명당 터이옵니다. 그러나 미리 지하수의 물길을 바꿔야 합니다. 산 아래에 연못을 만들고, 거기서 나온 흙으로 능 자리를 돋우시옵소서.” 왕은, “내 그렇게 하겠노라.”라고 대답하고 부평 사또에게 자신이 왔음을 알렸다. 부평 사또는 깜짝 놀라 달려 왔고, 즉시 왕명을 받아 연못을 파고 거기서 나온 흙을 쌓아 올렸다.
한 달 후 부왕의 묘를 이장하려고 그 묏자리를 팠다. 그러자 땅속에서 물이 콸콸 솟아올랐다. 왕은 크게 노했다. 지관은 급히 그 백발노인을 찾아 나섰다. 그때 반대편 산기슭에 그 백발노인이 지팡이를 짚고 서서는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이보시오. 능 자리에서 물이 콸콸 솟아나 전하께서 노하셨소이다.” 백발노인은 고개를 끄덕였다. “연못이 너무 얕고 능 자리에 흙을 덜 돋우었기 때문이오. 내 지금 해결하리다.” 그러면서 지팡이를 짚은 자리를 힘을 주어 푹 찌르니 탁하고 물이 솟아나며 홍수 때처럼 콸콸 골짜기로 흘러내렸다. “어서 가 보시오.” 백발노인의 말을 따라 능 자리에 가 보니 물은 사라지고 없었다. 인조왕은 안심하여 자신의 아버지인 원종과 어머니 인헌왕후의 관을 묻고 이곳을 장릉이라 이름을 명했다.
그 뒤 왕명을 받은 부평 사또가 또 다시 백발노인을 찾아갔다. 그런데 그곳에는 이미 집과 노인은 간 데가 없고 초여름인데도 나무에 서리가 가득 내려 앉아 있었다. 그래서 그 곳을 ‘나무서리’라고 부르고, 그것은 목상(木霜)으로 표기되어 오늘날 목상동의 지명이 되었다고 한다.
인조의 부왕 장릉과 관련하여 전해지는 또 다른 이야기가 대곶면 석정리의 돌우물에 관한 것이다. 장릉으로 이전하기 위해 인부들이 광중(壙中)[묘혈]을 팠으나 물이 솟구쳐 올라 더 이상 일을 할 수가 없었다. 이에 지관이 대곶면 석정리까지 뻗친 수맥을 따라가 그 곳의 작은 석정을 파헤쳤더니 바위틈에서 물이 터지며 솟구쳐 올랐고, 그로 인해 풍무동의 장릉 묘혈에 치솟던 물은 그치게 되었다. 이로써 무사히 하관하고 능의 역사를 마쳤다고 한다. 그런데 치솟던 대곶면 석정리의 돌우물은 물맛이 기막히게 좋았다. 뿐만 아니라 그 물은 영험이 좋은 약수여서 모든 병에 특효가 있었다. 특히 옻에 오른 사람이 찾아가 마시고 피부에 바르면 깨끗하게 나았다고 전해진다.
장릉 이전과 관련하여 전해지는 또 다른 이야기는 파주시 탄현면 질오목 유래의 전설이다. 장릉 이장으로 그 묏자리를 쓰고 있던 박중손(朴仲孫)의 묘소가 헐리게 되어 다른 묘 자리를 찾을 수밖에 없었다. 지관이 묘 자리를 찾으러 질오목[질우목]에 이르렀을 때 뒤에서 까마귀가 까옥까옥 하고 울어댔다. 지관이 그 까마귀 소리가 이상하여 정신을 차리고 보니 묏자리를 지나쳐 왔던 것이다. 돌아서서 까마귀 우는 곳으로 가보니, 때는 겨울이라 눈이 온 천하를 덮었는데도 한 곳에는 눈이 녹아 있었다. 가서 살펴보니 과연 좋은 묘 자리였다. 그래서 까마귀 소리를 듣고 돌아섰던 자리를 ‘질오목(叱吾目)’이라 불렀다고 한다. 이것은 ‘내 눈을 꾸짖는다.’는 뜻으로, 묏자리를 찾지 못한 눈을 꾸짖는다는 의미이다. 또 까마귀가 울던 곳을 ‘오고미(烏告美)’라 하였는데, 이것은 ‘까마귀가 알렸다.’는 뜻이다. 또 질오목과 오고미 사이에 ‘진말모퉁이’, ‘선모루’, ‘대종모퉁이’ 등의 지명이 있는데, 그 지관이 질오목까지 짓밟아 왔다고 하여 진말모퉁이, 섰다 하여 선모루, 대종 없이 왔다 하여 대종모퉁이라는 지명이 생겼다고 전해진다.
[모티프 분석]
「인조 부왕의 산역과 나무서리」의 주요 모티프는 ‘풍수지리에 근거한 명당 찾기’이다. 왕릉은 곧 왕권과 왕실의 상징이다. 조선시대의 왕릉 조성에서 가장 큰 비중을 차지하는 것이 풍수지리이다. 왕이나 왕비가 죽으면 가장 먼저 능 자리를 물색한다. 조정에서 근무하는 여러 지관이 도성 100리 이내에서 풍수상 좋은 자리들을 찾는다. 후보지들이 나오면 총호사로 임명된 예조판서나 정승이 풍수에 능한 조정대신 및 종친들을 대동하고 직접 현장을 답사한다. 동행한 궁중의 화원(畵員)들이 현장을 스케치한 산도(山圖)를 들고 임금에게 결과를 보고한다. 그러한 과정을 거쳐 최종 후보지가 결정된다. 따라서 풍수지리상 최고의 명당을 찾는 것이 왕릉 조성의 가장 중요한 일이었다. 왕실의 번창 여부가 바로 이 왕릉의 풍수와 불가분의 관련이 있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인조는 광해군에 대한 피의 반정을 통해 즉위한 왕으로 파란의 삶을 살았다고 할 수 있다. 서인이 주도한 인조반정으로 왕위에 올라 광해군 때의 후금의 존재를 인정하는 현실주의적 외교정책을 반인륜적인 것으로 비판하고 친명배금정책(親明排金政策)을 실시하는 가운데 정묘호란과 병자호란을 겪었다. 뿐만 아니라 그의 두 아들 소현세자와 봉림대군은 그 와중에 청에 볼모로 끌려갔었다. 그런데 두 아들은 서로 다른 관점으로 세상을 바라보았다. 소현세자는 국제사회의 질서는 명분이 아닌 힘이라는 국제질서를 뼈저리게 느끼고, 봉림대군은 아버지 인조의 뜻을 따라 명에 대한 지속적인 사대주의를 주장했다. 결국 소현세자의 사상은 인조를 격노하게 하였고, 그가 아들을 독살했다는 설까지 있다. 그리고 청에 대한 북벌론을 내세우면서 둘째 아들인 봉림대군을 왕위에 승계시킨다. 그것은 조선 국운의 쇠퇴의 시작을 의미한다고 볼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