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300158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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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燒失-旌閭閣說話 |
영어음역 | Sae Japda Sosildoen Jeongnyeogak Seolhwa |
영어의미역 | Tale of Monument Gate Shirine that Was Disappeared For Chatching a Bird |
분야 | 구비 전승·언어·문학/구비 전승 |
유형 | 작품/설화 |
지역 | 서울특별시 구로구|인천광역시 계양구 |
시대 | 조선/조선 후기 |
집필자 | 김미경B |
성격 | 설화|정려각소실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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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요 등장인물 | 윤기파|윤정|윤서|윤상우 |
관련지명 | 오류동 |
모티프 유형 | 개구쟁이 불장난|정려각 소실 |
[정의]
서울특별시 구로구에서 정려각 소실과 관련하여 전해 내려오는 이야기.
[개설]
「새 잡다 소실된 정려각 설화」는 지극한 효행을 한 사람에게 나라에서 표창하기 위하여 세워준 파평윤씨 집안의 상징인 정려각이 불에 타서 사라졌다는 정려각소실담이다. 정려각이란 조선시대에 나라에서 미풍양속을 장려하기 위하여 충신, 열녀, 효자 등 모범이 되는 사람을 표창하기 위해 그 사람이 사는 마을 입구에 세웠던 것이다. 고흥유씨 정려각, 효자 강순항 정려각, 무실 정려각 등을 전국의 각처에서 볼 수 있다.
오류동은 옛 수주읍 소재지로 부평도호부 때는 황어면 지역이었다. 이 마을에는 오리나무가 많이 자생하여 오리울, 오릿골, 오류올, 오류동이라고도 했다. 오리울이 생긴 유래를 살펴보면, 1595년(선조 28) 윤명선(尹明善)[1547~1608]이 부평도호부의 부사가 되어 부임해 보니 옛 수주 때 명재상 윤관이 수주지주사를 지냈음을 감명 깊게 생각하고 치사가 끝나자 이곳에 낙향하여 정착하였다. 이후 그 후손에서 많은 인물이 배출되어 7효자 4정려가 나온 효자 가문으로 일컬어졌다. 한편, 마을의 구성이 오리울, 넘말, 아랫말로 구분되어 ‘오리나무와 버드나무가 많아서 오리울이라’고 했다는 설도 있다.
[채록/수집상황]
2006년 8월 31일 인천광역시의 인터넷신문 『인천뉴스』의 「잉어에 얽힌 효자의 마을 오류동」의 끝부분에 실려 있다.
[내용]
옛날 구로가 속해 있던 부평부의 오류동마을은 조선시대에 효자의 마을로 명성이 높았다. 임진왜란 직후 부평부사를 지낸 윤명선이 여기에 터를 잡은 이후로 파평윤씨가 대대로 살아왔는데, 그들 일가가 모두 효성이 깊었다고 한다. 따라서 윤씨 집안에서는 효자들이 줄을 이어 나왔고, 조정에서는 그들을 표창하는 효자 정려문을 넷이나 내려 보내 그들을 세상의 모범으로 삼게 했다고 한다. 그래서 이 마을 산기슭에는 백 년 전까지만 해도 윤기파·윤정·윤서·윤상우 등의 정려각 네 개가 나란히 서 있었다고 한다. 그런데 어느 해인가 철모르는 동네의 개구쟁이들이 새를 잡는다고 불을 놓다가 그만 이 불이 정려각에 옮겨 붙어서 이 집안의 효의 상징인 정려각 모두를 불태워 소실시키고 말았다고 한다. 그때 조선 조정은 일제에 강제로 합병을 당했으며, 따라서 다시는 정려각을 내려 보낼 수가 없었다. 그렇게 정려각은 소실되었어도 선조의 효도 정신은 지금도 그들 가문에 핏줄을 타고 내려온다고 하는 사연이 전해진다.
[모티프 분석]
「새 잡다 소실된 정려각 설화」의 주요 모티프는 ‘개구쟁이 불장난’, ‘정려각 소실’ 등이다. 계양의 파평윤씨 집안은 효행으로 명성이 높아 조정으로부터 정려각을 네 번이나 하사를 받았다고 한다. 그런데 이 정려각이 아이들이 새를 잡기 위해 놓았던 불놀이에 그만 소실되었다는 어처구니없는 이야기가 전해진다. 그런데 그 사건에 대한 자료도 남아 있지 않아 정황을 자세히 알 수가 없으니 이 또한 안타까운 일이다. 한편 윤기파·윤정·윤서·윤상우 등의 선조가 한겨울에 잉어를 잡아 노모를 봉양했다는 효행담이 바로 「엄동에 잉어를 잡아 효도한 오류동의 윤효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