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3001008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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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九老勞動者連帶鬪爭聯合 |
영어음역 | Guronodongjayeondaetujaengyeonhap |
영어의미역 | Guro Workers Coalition |
분야 | 정치·경제·사회/사회·복지 |
유형 | 기관 단체/기관 단체(일반) |
지역 | 서울특별시 구로구 |
시대 | 현대/현대 |
집필자 | 정혜온 |
[정의]
서울특별시 구로구에 있었던 노동 운동 사회단체 연합.
[개설]
6·25전쟁 이후 최초로 일어난 연대 파업 사건이 바로 구로 지역 연대 파업 투쟁이며 이 연대 파업 투쟁을 위해 결성된 연합체를 구로노동자연대투쟁연합이라고 한다.
1980년대 중반 구로 지역 대부분의 공장들에서 저임금, 장시간 노동, 관리직과의 차별 대우 등이 극심하였다. 대우어패럴의 경우 정상 근무 10시간에 매일 2~8시간의 잔업이나 철야가 이어지면서 월 평균 80여 시간, 심할 경우 110시간의 초과근무가 발생하였다. 이러한 열악한 노동 환경은 이들 사업장의 노조 결성을 가져왔으며 그 시기는 1984년 6~7월경이었다. 그리고 비슷한 근로 조건 및 노조 결성 시기 등으로 여러 가지 연대 프로그램과 함께 각 노동조합간의 활발한 교류가 이루어지고 이는 다시 1985년 임금 인상 투쟁 시의 연대 강화로 이어졌다.
[설립목적]
구로노동자연대투쟁연합은 열악한 노동 조건과 잔업이라는 장시간의 노동 강제에 공동으로 대항하여 처우를 개선하기 위해 결성되었다. 1980년대 초 서울대학교의 여학생 운동가들이 사대, 인문대, 가정대를 중심으로 사회 변혁 운동을 위한 여학생 모임을 구성하여 활동하면서 구로공단에 진입하기 시작였다. 이러한 서울대학교 여성 운동가들의 움직임이 구로 지역 정치 소모임 형성의 모태가 되었으며, 이를 바탕으로 구로노동조합민주화추진연합이 탄생하게 되었다. 그리고 구로노동조합민주화추진연합은 구로 지역의 동맹 파업 및 연대 투쟁에 참여해 온 각 노동조합의 중심으로 활동하면서 ‘구로노동자연대투쟁연합’을 발족시켰다.
[활동사항]
1985년 6월 22일 오전 11시 경찰이 대우어패럴 노조사무실로 찾아와 김준용 위원장, 강명자 사무국장, 추재숙 여성부장 등 3명을 연행하였다. 경찰은 4월의 임금 인상 투쟁 때 파업 농성을 주도하며 노동쟁의조정법과 집회 및 시위에 관한 법률을 위반했다는 이유를 내세워 이들 모두를 구속하고 조합 간부 8명을 불구속 입건하였다. 이러한 조치는 전두환 정권이 노동운동을 다시 강력하게 탄압하려는 신호탄이라는 인식이 퍼지면서 함께 연대했던 노동조합들에게 위기감을 불러일으켰다.
한편 위원장 연행 소식을 전해 듣고 대우어패럴 노동자들은 즉각 작업을 중단한 후 1백여 명이 총무과로 몰려가 고발 취소를 요구하는 농성을 전개하였다. 다음날인 6월 23일 대우어패럴 외에 가리봉전자, 효성물산, 선일섬유, 청계피복 노조위원장들이 모여 24일부터 동맹 파업에 들어갈 것을 결의하였다. 6월 24일 오전 8시 경 대우어패럴 노동자 350여 명의 파업을 시작을 신호로 오후 2시에 효성물산 노조원 4백여 명이 파업에 동참하였고 가리봉전자 노조원 5백여 명, 선일섬유 노조원 70여 명 등도 파업에 돌입하였다.
이들은 ‘구속된 김준용 위원장 등 노조 간부의 석방과 노조 탄압 중지’를 요구하고 나아가 ‘노동악법 폐지하라’, ‘폭력경찰 물러가라’ 등을 주장하였다. 이러한 노동자의 투쟁에 대해 회사 측은 단전과 단수 조치를 단행했으며 경찰은 이들 공장 일대를 철통같이 경계하였다. 이에 공단 일대는 일촉즉발의 긴장이 감돌았다. 6월 25일 남성전기 조합원 3백여 명이 오후에 농성을 벌이고 세진전자 노조원 250여 명, 롬코리아 노동자 1백 여 명이 지지 철야 농성을 하는 등 연대 투쟁은 7개 업체로 확산되었다.
연대 투쟁에 대한 학생 및 재야의 지지도 이어졌다. 즉 민주통일민중운동연합 등 22개 단체에서 지지 농성이 있었고 6월 26일 오후에는 서울대학교 학생 2명이 ‘구속노동자 석방’을 요구하며 대우어패럴 맞은 편 협동봉제 공장에 올라가 지지 구호를 외치는 등 지지 시위가 이어진 것이다. 그러나 경찰의 공포 분위기 조성과 음식물 차단으로 인한 조합원들의 탈진과 실신 그리고 병원 후송이 계속되는 상황에서 대우어패럴 농성 시위대는 100여 명으로 줄어들었고 효성물산, 가리봉전자, 선일섬유의 농성 시위대는 보복 조치를 하지 않는다는 약속을 받고 농성을 자진 해산하였다.
6월 28일에는 부흥사 노조원 120여 명이 연대 파업에 돌입했으나 쇠파이프와 몽둥이로 무장한 관리자와 남성 사원들에 의해 강제 해산을 당하고 80여 명에게 강제사직서를 쓰게 하는 등 탄압이 계속되었다. 또한 먼저 농성을 푼 가리봉전자, 선일섬유 등에서도 주동자들에 대한 보복 조치가 이루어지고 있었다. 같은 날 대우어패럴에서는 노사 간 협상이 시도되기도 했으나 보복 조치를 하지 않겠다는 약속을 해달라는 노조의 요구를 회사가 거절함으로써 30분 만에 결렬되었다. 그리고 대학생 18명이 빵, 우유, 구급 의약품 등을 들고 공장 지붕을 넘어 농성장에 합류하는 등 농성에 대한 지원이 거듭되자 다음 날인 6월 29일 회사 측이 동원한 폭력배와 사복 경찰이 대우어패럴 농성장에 투입되면서 농성이 강제 해산되었다.
[의의와 평가]
구로노동자연대투쟁연합의 연대 투쟁으로 이로 인해 대량의 구속·해고 노동자가 발생하였고 이들을 중심으로 노동자들이 개헌 운동 등 정치적 민주화 운동에 본격 진출하는 계기가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