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300100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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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纖維勞動爭議 |
영어음역 | Seonilseomnyu Nodongjaengui |
영어의미역 | Sunil Fiber Labor Difficulties |
분야 | 역사/근현대 |
유형 | 사건/사건·사고와 사회 운동 |
지역 | 서울특별시 구로구 |
시대 | 현대/현대 |
집필자 | 구창환 |
성격 | 노동운동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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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생(시작)연도/일시 | 1985년 6월 24일 |
종결연도/일시 | 1985년 6월 29일 |
관련인물/단체 | 선일섬유 노동조합 |
[정의]
1985년 서울특별시 구로구에 있던 선일섬유에서 일어난 노동 운동.
[개설]
선일섬유는 1978년 설립된 자본 규모 3억8천2백만 원에 노동자 수 300여 명의 규모를 가진 메리야스 내의류 제조·판매 업체였다.
[역사적 배경]
12·12군사반란으로 등장한 전두환 군사 정권은 노동 운동가들을 노동자와 분리시키고 민주 노조 운동을 무력화시키기 위해 ‘정치 활동 금지 조치’를 내려 노동 운동가들을 탄압하였다. 이어 노조 결성 금지, 한국노동조합총연맹 및 산업별 노조의 활동을 유보시키는 것을 골자로 한 노동조합 활동 지침과 보완 지침[1980. 7. 1]을 10차례나 시달했고, 노동조합 정화 지침[1980. 8. 21]을 근거로 제1차 정화 조치 과정에서 민주 노조 간부 19명을 삼청교육대로 끌고 가 순화 교육을 시켰다.
이와 같은 제반 조치는 노동 운동의 발전 가능성을 사전에 봉쇄하고 군사 정권의 안정화를 꾀하려 한 것이었다. 이후 군사 정권은 1970년대 노동 탄압 정책을 계승·발전시키는 방식으로 탄압의 강도를 강화하였다. 그로 인한 저임금·장시간 노동 정책으로 인하여 노동자의 총 노동 시간은 1981년 238.1시간에서 1985년 240.2시간으로 늘어났다.
[목적]
선일섬유 노동자들은 저임금 해소와 장시간 노동 철회 등 처우 개선을 위하여 노조를 결성, 파업을 단행하였다.
[발단]
1984년 구로 지역에서는 6~7월 대우어패럴, 효성물산, 가리봉전자 등의 사업장이 민주 노조를 결성하였다. 선일섬유에서도 김현옥 외 6명이 노조 준비 모임을 갖고 6월 11일 연맹 회의실에서 73명이 모여 노조를 결성하였다.
[경과]
1985년 6월 22일 대우어패럴 노조의 위원장과 사무장, 여성부장 등 간부 3명이 전격적으로 구속되었다. 선일섬유 노조는 대우어패럴 노조, 효성물산 노조, 가리봉전자 노조 등과 함께 대책회의를 열고 동맹파업을 결의하였다.
6월 24일 아침 8시부터 대우어패럴 노조가 농성에 들어갔고, 선일섬유 노조도 140여 명이 모여 총회를 하였는데, 관리자들의 방해로 조합원이 70여 명으로 줄어들자 오후 2시부터 농성에 들어갔다. 효성물산 노조와 가리봉전자 노조도 파업을 시작하였다. 4개 노조는 ‘노동조합 탄압 저지 결사투쟁 선언’을 낭독하며 구속자 전원 석방과 노동악법 철폐, 부당해고자 전원 복직, 최저생계비 보장 등을 외쳤다.
[결과]
26~27일 양일간 정부와 기업의 폭력으로 동맹 파업을 한 노조들이 해산되었다. 선일섬유 노조 역시 27일 농성이 강제 해산되었다. 곧 이어 선일섬유 등에서는 농성 주동자들에대한 폭력적 보복이 난무하였다. 29일 마침내 대우어패럴 농성이 강제 진압되면서 구로동맹파업은 끝이 나게되었다.
[의의와 평가]
선일섬유 노동조합은 정부와 기업의 탄압에 맞서 노동자들의 권리를 쟁취하기위해 1984년 노조를 결성하였다. 선일섬유 노동조합은 1985년대우어패럴의 일방적인 노조간부 구속에 항의하여 대우어패럴 노동조합 및 효성물산 노동조합, 가리봉전자 노동조합 등과 함께 구로동맹파업을 하였다. 구로동맹파업에는 10개 사업장에서 약 2500여 명이 참여했으며, 민주통일민중운동연합 등 수많은 사회운동 단체들이 지지농성을 하였다. 이로써 노동자 간의 동질성을 확보하고, 정부 탄압에 개별노조로 대응해 와해되던 80년대초 노동운동의 한계를 극복할 수 있었다 하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