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3000659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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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鄭芝溶 |
영어음역 | Jeong Jiyong |
이칭/별칭 | 지용(池龍) |
분야 | 역사/근현대,성씨·인물/근현대 인물 |
유형 | 인물/예술인 |
지역 | 서울특별시 구로구|경기도 부천시 |
시대 | 근대/근대,현대/현대 |
집필자 | 김정진 |
[정의]
일제강점기 부천 지역에서 활동한 시인.
[활동사항]
정지용(鄭芝溶)[1902~?]은 충청북도 옥천군 옥천읍에서 한의사였던 아버지 정태국(鄭泰國)과 어머니 정미하(鄭美河)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가정은 유복한 편이었으나 어릴 때 홍수를 당하여 소년 시절이 순탄하지는 않았다. 1914년 옥천공립보통학교를 졸업하였고, 1918년 휘문고등보통학교에 입학하여 이때부터 글을 쓰기 시작하였다. 1921년 휘문고등보통학교를 졸업하고 이듬해 일본으로 건너가 도시샤대학[同志社大學] 영문과에 입학하였다.
1927년 26세 때 「향수」를 비롯한 문학 작품 30여 편을 발표하였고, 1929년 도시샤대학을 졸업하고 귀국하여 모교인 휘문고등보통학교 영어과 교사가 되었다. 1930년 『시문학』 동인으로 활동하면서 문단에서 두각을 나타내기 시작하였고, 1935년 첫 시집인 『정지용 시집』을 출간하였다. 1945년 8·15광복 뒤 이화여자대학교 교수로 재직하였고, 6·25전쟁 때 인민군 정치보위부에 붙잡혀 평양 감옥으로 이송되었다가 1950년 9월 25일 사망하였다. 대한민국에서는 납북 여부와 사인이 모호하여 한때 이름이 ‘정〇용’으로 표기되고 그가 지은 시도 금기시되었으나 1988년 해금되었다.
정지용이 부천과 특별한 인연을 맺게 된 것은 제2차세계대전 중 일제가 미국과 전쟁을 앞두고 서울 사람들을 지방으로 소개령을 내릴 때 부천으로 내려온 것이 계기가 되었다. 정지용은 부천에서 우리말로 시를 짓는 일조차 죄가 되는 어두운 시대를 살면서 시를 사랑하는 마음을 가슴에 깊이 묻어 둔 채 활발한 신앙생활을 하였다. 천주교도로서 부천에 교당이 없음을 안타깝게 여기고 인천교구를 찾아다니며 물질적인 지원을 요청하는 한편 손수 벽돌을 쌓아 오늘의 소사성당을 있게 하였다.
정지용은 초기에 모더니즘과 종교적 경향의 시를 주로 발표하였으나 후기에는 널리 알려진 작품 「향수」에서 보이듯이 서정적이고 한국의 토속적인 이미지즘의 시를 발표함으로써 자연시 또는 산수시라 일컫는 한국 현대시의 새로운 경지를 열었다고 평가받고 있다.
[저술 및 작품]
「향수」·「유리창 1」·「바다 9」·「비」·「장수산(長壽山)」 등의 시가 있으며, 시집으로 『정지용 시집』, 소설로 「삼인(三人)」이 있다.
[상훈과 추모]
1989년 정지용문학상이 제정되었다. 정지용의 대표 시 「향수」는 노래로 만들어져 1995년 통기타 가수 이동원과 박인수 서울대학교 교수가 듀엣으로 부르기도 하였다. 이 노래는 앨범 「그곳이 차마 꿈엔들 잊힐리야」에 실려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