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300047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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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永膺大君 |
영어음역 | Yeongeungdaegun |
영어의미역 | Yeongeung Prince |
이칭/별칭 | 명지(明之),서곡(西谷),경효(敬孝) |
분야 | 역사/전통 시대,성씨·인물/전통 시대 인물 |
유형 | 인물/왕족·호족 |
지역 | 서울특별시 구로구 |
시대 | 조선/조선 전기 |
집필자 | 김상열 |
[정의]
조선 전기의 세종대왕의 여덟 번째 왕자.
[가계]
본관은 전주(全州). 자는 명지(明之), 호는 서곡(西谷). 세종과 소헌왕후(昭憲王后) 심씨(沈氏) 사이에서 여덟 번째 아들로 태어났다. 큰형이 문종, 둘째 형이 세조이다. 여산 송씨(礪山宋氏) 판중추부사(判中樞府事) 송복원(宋復元)의 딸을 아내로 맞이하였으나, 후에 여산 송씨가 병으로 내쫓긴 뒤 해주 정씨(海州鄭氏) 한성부윤(漢城府尹) 정충경(鄭忠敬)의 딸을 아내로 맞았다. 이후 연안김씨(延安金氏)를 세 번째 부인으로 맞았다. 아들은 청풍군(靑風君) 원(源)이며, 손자는 화림정(花林正) 단(檀), 증손자는 흥선부정(興善副正), 흥정부수(興貞副守) 경조(敬祚)이다.
[활동사항]
영응대군(永膺大君)[1424~1467]은 1441년(세종 23)에 영흥대군(永興大君), 1443년(세종 25)에 역양대군(歷陽大君), 1447년(세종 29)에 영응대군으로 고쳐서 임명되었다. 아버지 세종의 총애가 지극하였으며, 세종의 붕어 장소도 영응대군의 저택인 동별궁이었다. 영응대군의 졸기(卒記)가 『세조실록(世祖實錄)』 권 41 1467년(세조 13) 2월 2일자 기사에 다음과 같이 소개되었다.
“영응대군 이염(李琰)이 졸(卒)하였다. 염(琰)은 세종의 여덟 번째 아들로 겨우 말을 할 줄 알 적에 어린아이를 조각(雕刻)하여 만든 화촉(花燭)을 보고 놀라며 말하기를, “초[燭]가 타면 반드시 ‘초에 조각한’ 어린아이에게 화가 미치게 될 것이니 차마 보지 못하겠다” 하니, 세종이 이를 크게 기특하게 여기었다.
처음에 영흥대군에 봉하였다가 뒤에 영응대군으로 고쳤다. 세종이 매우 사랑하여 일찍이 염을 세조에게 부탁하였으므로, 세조가 보살펴 주기를 여러 아우들보다 특별히 하였다. 염이 일찍이 병이 드니, 세조가 매우 염려하여 무릇 병이 나을 수 있는 것은 해 보지 않은 것이 없었고, 대궐에서 집까지의 길에 사신의 왕래가 끊이지 아니하였다.
염은 타고난 바탕이 순후(醇厚)하고, 글씨와 그림에 뛰어나며, 음률(音律)에 밝았다. 세종이 일찍이 내탕고(內帑庫)의 진귀한 보물을 염에게 모두 주려고 하다가 미처 못하고 사망하였으므로, 문종이 즉위하고 얼마 있다가 내탕고의 보물을 내려 주어 그 집으로 다 가져갔다. 이로써 어부(御府)의 대대로 전해 내려오던 보화가 모두 염에게로 돌아가니, 그 재물이 누거만(累巨萬)이 되었다.
그러나 자못 검소하고 절약하여 사치를 일삼지 아니하고, 대궐에 들어가 임금 곁에 있을 때도 자신을 낮추어 공손히 하고 삼가하고 조심하여 조금도 허물과 실수가 있지 아니하므로, 세조가 매우 중히 여기었다. 세종이 일찍이 송복원의 딸을 택하여 배필로 삼았는데, 송씨(宋氏)가 병이 있어서 세종이 명하여 그를 버리게 하고 정충경의 딸에게 다시 장가들게 하였다. 세종이 승하하자, 염이 송씨를 그리워하여 정씨를 내쫓고 송씨와 다시 합하여 살았다.
처음에 군부(君父)의 명령 때문에 송씨를 버렸고, 정씨는 또한 버릴 만한 죄가 없는데도 사랑과 미움으로 내쫓고 받아들였으므로 당시의 의논들이 이것을 단점으로 삼았다. 시호를 경효(敬孝)라 하였으니, 밤낮으로 경계한 것을 경(敬)이라 하고, 도덕을 지키고 어기지 아니하는 것을 효(孝)라 한다. 측실(側室)에 아들 하나가 있다.”
[저술 및 작품]
1463년(세조 9) 『명황계감(明皇誡鑑)』의 가사를 한글로 번역하였고, 글씨와 그림에 능하고 음률에도 통달하였다.
[묘소]
묘소는 경기도 시흥시 군자동 산70번지에 있으며, 1988년 5월 31일 시흥시 향토유적 제9호로 지정되었다. 1467년(세조 13) 2월 2일 서울 견지방(堅志坊) 자택에서 졸하여 이해 3월 19일 경기도 양주 군장리(郡場里)에서 예장을 치른 후, 1498년(연산군 4)에 신도비를 세웠다.
그 뒤 1900년(고종 37) 9월 17일 대군의 첫 부인 춘성부부인(春城府夫人) 해주정씨와 둘째 부인 대방부부인(帶方府夫人) 여산송씨의 묘를 현 위치로 천장한 후 1968년 서울특별시 관악구 봉천동에 있던 셋째 부인 연안부부인(延安府夫人) 연안김씨 및 아들 청풍군(靑風君)과 손자 화림정(花林正), 그리고 증손 흥선부정, 흥정부수의 묘를 옮겨 봉안하였다.
묘소는 대군과 해주정씨 및 여산송씨와 합장이고, 그 왼쪽에 연안김씨의 묘가 자리잡았다. 신도비는 묘에서 동남쪽으로 약 50m 떨어져 있는데, 기단석 대신에 귀부 위에 비신(碑身)을 세웠고, 다시 그 위에 옥개석 대신에 이수(螭首)를 얹어 놓았다. 비신은 높이 1.45m, 너비 0.84m, 두께 0.21m이다. 비면에는 ‘영응대군신도비(永膺大君神道碑)’란 전제(篆題)와 ‘유명조선국영응대군시경효공신도비명(有明朝鮮國永膺大君諡敬孝公神道碑銘)’이란 비제(碑題)가 새겨져 있다.
비문은 승정원도승지 임사홍(任士洪)이 짓고 아울러 전액(篆額)하였으며, 글씨는 기위부사정 박경(朴耕)이 썼다. 묘 어귀에는 1969년 대군의 시호를 취한 재실 경효재가 세워졌으며, 1997년 경효사란 사당이 건립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