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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타데이터
항목 ID GC03000443
한자 鄭希良
영어음역 Jeong Huiryang
이칭/별칭 순부,허암
분야 역사/전통 시대,성씨·인물/전통 시대 인물
유형 인물/문무 관인
지역 서울특별시 구로구
시대 조선/조선 전기
집필자 남달우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성격 문신
성별
생년 1469년연표보기
몰년 미상
본관 해주(海州)
대표관직 봉교

[정의]

조선 전기 구로 지역에서 활동한 문신.

[가계]

본관은 해주(海州). 자는 순부(淳夫), 호는 허암(虛庵). 철원부사 정연경(鄭延慶)의 아들이다.

[활동사항]

정희량(鄭希良)[1469~?]은 1492년(성종 23) 생원시에 장원으로 합격하였으나, 성종이 죽자 태학생(太學生)·재지유생(在地儒生)과 더불어 올린 소가 문제되어 해주에 유배되었다. 1495년(연산군 1) 별시문과에 병과로 급제, 승문원(承文院)의 권지부정자(權知副正字)에 임용되었다. 이듬해 김전(金詮)·신용개(申用漑)·김일손(金馹孫) 등과 함께 사가독서(賜暇讀書)될 정도로 문명이 있었다.

1497년 예문관대교(藝文館待敎)에 보직되어 임금이 마음을 바로잡아 경연(經筵)에 근면할 것, 간언을 받아들일 것, 현사(賢邪)를 분별할 것, 대신을 경대(敬待)하며 환관을 억제할 것, 학교를 숭상하며 이단을 물리칠 것, 상벌을 공정히 하고 재용(財用)을 절제할 것 등의 소를 올린 바 있다. 다음해 선무랑(宣務郎)·행예문관봉교(行藝文館奉敎)로서 『성종실록(成宗實錄)』 편찬에 참여하였다.

무오사화 때에는 사초문제(史草問題)로 윤필상(尹弼商) 등에 의하여 신용개·김전 등과 함께 탄핵을 받았는데, 난언(亂言)을 알고도 고하지 않았다는 죄목으로 장(杖) 100, 유(流) 3,000리의 처벌을 받고 의주에 유배되었다가 1500년 5월 김해로 이배되었다. 이듬해 유배에서 풀려나 직첩을 돌려받았으나 대간·홍문관직에는 서용될 수 없게 되었다. 그해 어머니가 죽자 고양에서 수분(守墳)하다가, 산책을 나간 뒤 다시 돌아오지 않았다.

[학문과 사상]

김종직(金宗直)의 문인이다. 총민박학(聰敏博學)하고 문예에 조예가 있었을 뿐만 아니라 음양학(陰陽學)에도 밝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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