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300044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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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姜希孟 |
영어음역 | Gang Huimaeng |
이칭/별칭 | 경순(景醇),사숙재(私淑齋),운송거사(雲松居士),국오(菊塢),만송강(萬松岡) |
분야 | 역사/전통 시대,성씨·인물/전통 시대 인물 |
유형 | 인물/문무 관인 |
지역 | 서울특별시 구로구 |
시대 | 조선/조선 전기 |
집필자 | 남달우 |
[정의]
조선 전기 금양현에 낙향한 문신.
[가계]
본관은 진주(晉州). 자는 경순(景醇), 호는 사숙재(私淑齋)·운송거사(雲松居士)·국오(菊塢)·만송강(萬松岡). 아버지는 지돈령부사를 지낸 강석덕(姜碩德)이다. 인순부윤(仁順府尹)을 지낸 강희안(姜希顔)의 동생으로, 세종의 이질(姨姪)[처조카]이다.
[활동사항]
강희맹(姜希孟)[1424~1483]은 18세 때인 1447년(세종 29) 별시문과에 장원으로 급제한 뒤 종부시주부(宗簿寺主簿)가 되었다. 1450년(세종 32) 예조좌랑과 돈령판관을 역임하고, 1453년(단종 1) 예조정랑이 되었다. 1455년(세조 1) 원종공신 2등에 책봉되었고, 그 뒤 예조참의·이조참의를 거쳐, 1463년(세조 9) 중추원부사로서 진헌부사(進獻副使)가 되어 명나라에 다녀왔다.
1464년(세조 10) 부윤으로 어제구현재시(御製求賢才試)에 2등으로 합격하고, 1466년(세조 12) 발영시(拔英試)에 3등, 등준시(登俊試)에 2등으로 급제하여 세조의 총애를 받아 세자빈객이 되었다. 이후 예조판서를 거쳐 1467년(세조 13)에는 형조판서로 특배되었다. 1473년(성종 4) 병조판서가 되고, 이어서 판중추부사·이조판서·판돈령부사·우찬성을 역임한 뒤, 1482년(성종 13)에 좌찬성에 이르렀다. 인품이 겸손하고 치밀하여 맡은 일을 잘 처리했다고 평가받았다.
[학문과 사상]
강희맹은 경사(經史)와 전고(典故)에 통달했을 뿐만 아니라 당대에 뛰어난 문장가였다. 사대부로서의 관인적 취향과 섬세한 감각을 가진 문인이면서도 민간에 전승되고 있는 민요와 설화에 깊은 관심을 가져 관인 문학(官人文學)의 고답적인 자세를 스스로 파괴해 버렸다.
[저술 및 작품]
소나무와 대나무 및 산수화를 잘 그렸는데, 현재 일본의 오구라문화재단[小倉文化財團]에 소장되어 있는 「독조도(獨釣圖)」는 강희맹의 작품으로 알려져 있다. 글씨로는 원각사비(圓覺寺碑)의 액전(額篆), 아버지 강석덕과 강지돈(姜知敦)의 묘표의 액서(額書), 「합천홍류동차필암각(陜川紅流洞泚筆巖刻)」 등을 썼다. 『농구십사장(農謳十四章)』은 생활 주변에서 채집한 농요를 모아 정리한 것으로, 농민들의 애환과 당시 농정(農政)의 실상이 잘 묘사되었는데, 그의 시 중에서 가장 뛰어나다는 평을 받았다.
1471년 지춘추관사로서 신숙주(申叔舟) 등과 함께 『세조실록(世祖實錄)』·『예종실록(睿宗實錄)』 편찬에 참여하였다. 1475년(성종 6) 금양현[지금의 서울특별시 구로구와 경기도 과천·시흥 지역]에 잠시 낙향하여 직접 농사를 짓고, 촌로들과 대화하면서 『금양잡록(衿陽雜錄)』을 저술하였다. 할아버지와 아버지, 형의 시집인 『진산세고(晉山世稿)』를 편찬하였으며, 세조 때 『신찬국조보감(新撰國朝寶鑑)』·『경국대전(經國大典)』의 편찬과 사서삼경을 언해했고, 성종 때는 『동문선(東文選)』·『동국여지승람(東國輿地勝覽)』·『국조오례의(國朝五禮儀)』·『국조오례의서례(國朝五禮儀序例)』의 편찬에 참여하였다. 저서로 『사숙재집(私淑齋集)』, 『금양잡록(衿陽雜錄)』, 『촌담해이(村談解頤)』 등이 있다.
[묘소]
묘소는 경기도 시흥시 하상동 산2번지[하상로 59]에 있다.
[상훈과 추모]
1468년(예종 즉위년) 남이(南怡)의 옥사(獄事)를 다스린 공으로 익대공신(翊戴功臣) 3등에 책봉되어 진산군(晉山君)에 봉해지고, 1471년(성종 2)에는 좌리공신(佐理功臣) 3등에 책봉되었다. 시호는 문량(文良)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