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300043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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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鄭元容 |
영어음역 | Jeong Wonyong |
이칭/별칭 | 선지,경산 |
분야 | 역사/전통 시대,성씨·인물/전통 시대 인물 |
유형 | 인물/문무 관인 |
지역 | 서울특별시 구로구 |
시대 | 조선/조선 후기 |
집필자 | 오계화 |
[정의]
조선 후기의 문신.
[가계]
본관은 동래(東萊). 자는 선지(善之), 호는 경산(經山). 고조할아버지는 진사(進士) 정임선(鄭任先), 증조할아버지는 정석증(鄭錫曾), 할아버지는 사간원대사간을 역임한 정계순(鄭啓淳)이다. 아버지는 돈령부도정(敦寧府都正)을 역임한 정동만(鄭東晩)이다. 어머니는 용인이씨로 예조참판을 역임한 이숭우(李崇祐)의 딸이다. 아내는 강릉김씨로 예조판서를 지낸 김계락(金啓樂)의 딸이다. 3남 1녀를 두었는데, 1남 정기세(鄭基世)는 이조판서를 역임하였고, 2남 정기년(鄭基年)은 목사, 3남 정기명(鄭基命)은 부사를 지냈다.
[활동사항]
1802년(순조 2) 정시(庭試)에 을과로 급제하였다. 가주서(假注書)를 거쳐 대사간 등을 지내고, 1821년(순조 21) 서북 지방에 괴질이 크게 돌자 관서위유사(關西慰諭使)가 되어 위문하였다. 강원도관찰사 등을 역임하고, 1831년(순조 31) 동지사(冬至使)로 청나라에 다녀왔다. 1837년(헌종 3) 예조판서에 오르고, 이후 이조판서·우의정·좌의정·중추부판사 등을 두루 역임하였다.
1848년(헌종 14) 영의정의 자리에 올랐고, 다음해 헌종이 죽자 영의정으로서 강화도에 있던 덕완군(德完君) 이원범(李元範)을 맞이하여 임금이 되게 하는 데 공헌하였다. 1862년(철종 13) 이정청(釐正廳)의 총재관(總裁官)을 거쳐, 이듬해 철종이 죽자 원상(院相)이 되어 고종 즉위까지 국정을 처결하였다. 1864년(고종 1) 총재관으로 『철종실록(哲宗實錄)』의 편찬을 주관하였다. 다섯 왕을 차례로 모시며 고위 관직을 두루 역임하고, 1873년 생을 마감하였다.
[저술 및 작품]
저서로 『경산집』 40권, 『황각장주(黃閣章奏)』 21권, 『북정록(北征錄)』 10권, 『수향편(袖香編)』3권, 『문헌촬요(文獻撮要)』 5권 등이 있다.
[묘소]
묘는 현재 경기도 광명시 학온동에 위치하고 있다. 조선 후기 행정 지명은 시흥군 서면 노온사리에 해당한다. 이때 지금의 서울특별시 구로구 일부 지역이 시흥군에 포함되어 있었다.
[상훈과 추모]
부음을 접한 고종이 애도의 뜻을 전하며 동원부기(東園副器)[왕실의 관인 동원비기를 만들고 남은 판재] 1부를 내렸다. 시호는 문충(文忠)이다.